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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소장종이책 정가16,000
전자책 정가30%11,200
판매가11,200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작품 소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러시아 교단은 이 책을 읽고 톨스토이를 파문했고,
마하트마 간디는 이 책을 읽고 비폭력운동을 시작했다!

모든 권력과 억압, 강제를 거부하고, 우리의 의식 앞에 소환된 사랑과 평화, 자유의 계율을 받아들이라고 권면하는 사상가 톨스토이의 명저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국내 최초 완역판!
이 책은 톨스토이가 1891년 63세에 쓰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893년에 집필을 종료했으나 바로 검열에 걸려 러시아에서는 출판되지 못하고 1년 뒤인 1894년 독일과 영국에서 출판된 저작이다. 사실 톨스토이가 1880년대 집필했던 저서 가운데 대다수는 그의 조국 러시아에서 출간 금지를 당했다. 그 바람에 그는 러시아보다 유럽에서 먼저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데, 그중 특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이다. “권력과 억압, 강제를 거부하고, 신의 계율인 사랑과 평화, 자유를 받아들여 개인의 인식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어야만 인민 각자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었고, 특히 간디의 생활을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간디는 1894년 막 영국에서 출판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남아프리카에서 읽은 뒤 비폭력운동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20세기의 마틴 루서 킹을 비롯한 많은 비폭력운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이후로도 종교인은 물론 다양한 위치에서 활동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국가와 종교, 진리와 자유, 평등과 평화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인생관―개인적인(동물적) 인생관, 사회적인(이교도적) 인생관, 신적인(영성적) 인생관―에 따른 인류의 발달 과정과 각 차원에 수반되었던 모순들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면 ‘신의 나라’라고 일컫는 고차원적인 삶에 이를 수 있는지 그 길을 안내한다. 권력의 악행을 비판하는 무저항 사상 소개를 시작으로 기독교 내부와 학자들에게 만연한 그리스도 가르침의 오해, 전쟁이나 병역의무 같은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 및 불복종, 그 결과로 인민들이 당면하게 되는 생활과 양심 사이의 문제 등을 거쳐 진정한 해방은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더불어 인생관의 변화 아래에서만 가능함을 논리적으로 정연하게, 그리고 매우 아름답고 풍성한 은유와 함께 보여준다. 이 책의 1장은 비폭력에 관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고, 2장은 러시아 정교회의 기독교 복음에 대한 해석에 대한 반론이다. 3장은 기독교에 대한 기독교도의 오해를 비판한 것이며, 4장은 학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비판한 것이다. 5장에서는 생활과 양심의 모순에 대해 말한 뒤, 6장과 7장에서는 각각 전쟁과 병역의무를 비판한다. 그리고 8장에서는 무저항 수용의 필연성, 9장에서는 기독교적 인생관의 수용이 해방의 길임을 강조한다. 이어 10장에서는 국가를 거부하고, 11장에서는 폭력을 끝내기 위해 기독교적 인생관을 다시 강조한다. 마지막 결론인 12장에서는 앞의 여러 장을 요약하며 그 요지를 반복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사상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을 위한 옮긴이의 친절하고 명쾌한 해제, 당대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관련 이미지들은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켜줄 것이다. 국내 인문학자들 가운데 톨스토이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가장 뛰어난 영남대 박홍규 교수는 ‘고전 중의 고전’인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상황을 애통해하던 끝에 2016년 5월 이를 국내 최초로 완역하여 소개하게 되었고, 이어서 톨스토이가 경제 불평등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번역ㆍ출간할 예정이다.


사상가 톨스토이의 진수를 만나다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세상사 전반에 관한 톨스토이의 사상을 집약한 책인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를 국내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우리나라에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굵직한 작품을 쓴 ‘세계문학전집’용 작가로, 혹은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의 짧고 교훈적인 소설을 쓴 계몽적인 작가로 각인되어 있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읽을 게 별로 없는,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톨스토이”라는 기형적 이미지와 함께. 하지만 톨스토이는 대중이 곧잘 오해하는 것처럼 ‘앞뒤가 꽉 막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다. 박제된 도덕과 계몽을 강조하는 ‘꼰대’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귀족 신분이라는 현실과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인간적이고 소박한 인물이며, 자연에 반하는 인위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인간 각자의 개성을 찾아가는 진정한 교육에 헌신했던 인류의 교사였다. 따라서 톨스토이의 진면목은 소설이 아니라 그가 쓴 일련의 저작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를 테면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를 비롯하여 『교의 신학 비판』,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 등의 저작들이 바로 그 예이다.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종교서일까?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종교서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책은 무조건 기독교를 찬양하는 흔한 종교서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 권력과 결탁한 부패한 기독교, 특히 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이를 널리 퍼트림으로써 군대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을 어떻게 옹호하는지, 그리스도 가르침의 정수인 사랑과 용서, 평화와 평등, 폭력 거부와 무저항 등의 진리를 어떻게 변색시켰는지 보여주는 가장 반(反)기독교적인 책이다. 19세기 말 러시아 정교에서 톨스토이를 파문시킨 것도 이해 가능한 일이다.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능해진다고 하는 ‘새로운 생활’이란 곧 비폭력 무저항, 반(反)권력의 자유와 평등 및 평화의 삶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폭력 특히 전쟁을 거부하는 삶이며, 군대에 가거나 무기를 드는 것조차 거부하는 삶이고, 국가기구와 관련된 모든 법제와 억압을 거부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는 톨스토이가 당대 러시아의 국가 종교였던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국가의 무용성과 아나키즘을 강조한 책인 동시에 그가 개인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었던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를 잇는 사회적 확대판이자 학문ㆍ예술ㆍ사회ㆍ문화ㆍ경제 등 세상사 전반에 걸친 톨스토이 사상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신의 나라는 개인의 삶이 변할 때 비로소 열린다

톨스토이는 ‘신의 나라’가 ‘네 안에 있다’고 말한다. 천국이나 천당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나의 실천, 나의 생활, 나의 삶 속에 있는 것으로, 이는 우리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도무지 접근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즉 기독교를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 해도 각자의 삶이 그대로라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삶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은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가 아닌 새로운 생활의 이해’라는 부제와 함께 생각할 때 한층 명확해진다. 핵심 내용인 ‘권력에 대한 비폭력 저항’의 문제 역시 신의 존재나 하늘나라의 유무와 관계없이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연결되는 탓이다. 톨스토이는 위선과 억압으로 자신과 세상을 더럽히지 말고, 그리스도의 본래 가르침에 따라 각 개인이 사랑과 평화ㆍ평등의 관계를 유지하며, 병역의무나 전쟁ㆍ사형과 같은 국가 권력에 봉사하지 말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탐욕에서 벗어나야만 ‘새로운 생활’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점은 그가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간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련의 기독교적 논의에 대한 비판, 날아가고자 애쓰는 벌 떼의 비유, 그리고 무력하게 징병당한 러시아 민중의 예 등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현대인이 겪는 다양한 차원의 모순과 갈등의 단초를 분석하고, 역사상의 실책과 오류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삶 즉, ‘신의 나라’로 일컬어지는 이상적인 사회를 제안했던 톨스토이의 ‘고전 중의 고전’을 만나보자.


출판사 서평

<본문 중에서>

사람은 혼자서 살인을 하지 않는다. 그가 같은 인간을 죽인다면 그는 살인자다. 만일 2명, 10명, 100명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 역시 살인자들이다. 그러나 국가나 국민이, 그들이 좋아하는 만큼을 죽인다면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 위대하고 고귀한 행위가 된다. 사람들을 대규모로 함께 모은다면 수만 명의 학살은 무죄의 행위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정확히 몇 명의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다. 혼자서는 약탈하거나 강탈할 수 없으나 전 국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정확히 몇 명이 필요한가? 왜 1명, 10명, 100명으로는 신의 율법을 깨어서는 안 되는데, 엄청나게 많은 수의 국민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_1장 [발루의 무저항 사상] 중에서


어린이의 의식이 가장 먼저 일깨워질 때부터 교회는 그를 속인다.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것을 최고의 엄숙함으로 포장하여 어린이들에게 주입시키고, 이것이 어린이의 본성 안에 습관으로 고착될 때까지 계속해서 주입하고 또 주입한다. 즉 그들은 매우 교묘하게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어린이를 기만하고, 그 기만이 어린이와 함께 자라게 하여 그것을 뿌리 뽑기조차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그런 다음 그들에게 전체 세상의 학문과 현실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결코 어린 시절 이미 주입된 믿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교회는 이제 인민들 각자가 이러한 모순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찾아가도록 책임을 돌려버린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면,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주입한 두 가지 반대되는 이론 때문에 영혼이 혼미하여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생각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려면,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사회에서 교육받도록 권유하면 된다. 아마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_3장 [교회의 최면술과 기만술] 중에서


그러나 인간의 삶은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 존재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의 뜻에 오롯이 부합한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동물적 삶과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삶의 합성이다. 이러한 합성이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삶에 접근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은 더더욱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삶 속에서 더욱더 커지게 된다. 기독교에 의한 삶은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완성으로의 꾸준한 전진이다. 따라서 어떤 상태가 다른 것보다 높거나 낮을 수 없다. 이 모든 각각의 상태는 도달할 수 없는 완성을 향한 길 위에 있는 특정한 단계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자체로서 위대하다거나 초라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우리가 신적인(또는 영성적인) 생활의 완성을 향해 빠르게 나아가는 길만이 삶의 향상을 가져올 따름이다. 그러므로 세리 삭개오나 간통녀,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렸던 강도가 완성을 향해 떼었던 그 발걸음들은 바리새인의 정체된 정의보다 더 높은 정도의 생활임을 암시해준다. 따라서 이 종교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계율이 없다. 낮은 단계에 있더라도 완성을 향하여 계속 움직이는 사람은 완성을 향해 계속 움직이지 않는-비록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사람보다 더욱 도덕적이며, 더욱 나은 삶을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많이 이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양이 잃어버리지 않은 양보다 아버지에게 더욱 소중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나 잃어버린 몇 푼을 다시 찾은 이야기 등도 마찬가지다.
_4장 [학자들의 첫째 오해_실천 불가능성] 중에서


압제자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비록 스스로는 원한다 할지라도 압제자들은 압제를 끝낼 수 없다. 그들이 압제의 강도를 늦추는 그 순간에 바로 그들 스스로가 멸망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복지, 8시간 노동제, 연소자와 여성의 노동, 저축은행과 연금에 대해 배려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 압제를 늦추지 않는다. 이 모든 기만은 그저 사탕발림이거나, 노예들이 그들의 일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도록 제자리에 잘 묶어두려는 제스처일 뿐이다. 그러나 노예는 여전히 노예이고, 노예 없이 살 수 없는 주인은 이전보다 더욱 단단하게 그를 얽매고자 한다.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줄 마음을 가진 주인은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동자에 대한 지배 계급의 태도는 적을 땅에 넘어뜨린 뒤 꽉 붙잡고 있는 사람의 태도와 같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적을 붙잡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 1초라도 적에게 자유를 허용할 경우, 손에 칼을 든 채 성이 잔뜩 난 적이 자신을 찔러 죽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_5장 [빈부 갈등의 경제적 모순] 중에서


애국적 미신은, 인민으로부터 거두어들인 돈으로 국경일 행사라든지 구경거리, 기념물 제작이나 축제 등 행사들을 벌여 인민이 자신의 국가와 통치자들의 권위를 느끼고 이에 중요성을 부여하도록, 그리고 자기 국가를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자국과 그 통치자들이 위대하다고 인식시키며, 다른 국가에 대해 반목하고 증오심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장려하는 제반 행동에 있다.
이런 목적을 가진 독재 국가에서는 인민을 계몽하는 책을 인쇄하거나 배포하거나 연설하는 것을 금지하게 마련이다. 인민을 무감각으로부터 깨우려는 사람은 누구든 추방되거나 투옥된다. 어디 그 뿐인가? 모든 국가에서 예외 없이 인민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억제되고, 인민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도리어 장려된다. 가령 종교적 및 애국적 미신 같은 야만주의에 그들을 묶어두는 것은 문학 작품, 모든 종류의 감각적 오락, 구경거리, 서커스, 극장, 그리고 심지어 중독을 초래하는 담배나 술 같은 육체적 수단 같은 것인데, 이것들은 대개 국가의 주된 수입원이다. 심지어 매춘도 인정되고 장려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앞장서 조직하기도 한다.
_8장 [폭력을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_협박, 매수, 최면, 군사적 강압] 중에서


인간의 현재 상태는 마치 가지 끝에 덩어리진 채 매달려 있는 벌 떼와 같다. 가지 위에 자리한 벌들의 상태는 일시적이며 필연적인 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반드시 날아올라 스스로 새롭게 살아갈 곳을 찾아가야 한다. 모든 벌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며, 종종 자신과 다른 벌의 상태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들 중 아무도 나머지 다른 벌들이 먼저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렇게 할 수 없다. 또 어떤 벌도 급격히 날아갈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달려 있는 탓에 벌 떼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 모두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벌들은 결코 그들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인민이 사회적 인생관의 역경에 사로잡혀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 만일 날 수 있는 모든 벌이 날려고 시도하지 않으면, 다른 벌 역시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벌 떼는 결코 그 상태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적 인생관에 익숙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신봉하는 인생관에 따라 살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결코 그 상태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벌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출발해 날아가기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벌을 따라 다른 벌이, 또 다른 벌이, 더 나아가 뭉쳐 있느라 꿈적도 하지 않던 모든 벌들의 덩어리가 어느새 자유롭게 나는 벌 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도 똑같은 방식이 적용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라도 기독교가 요구하는 대로 생활을 이해한다면, 그리고 그를 따라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이 똑같이 행동한다면,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사회생활의 마법의 고리도 마침내 부서져버릴 것이다.
_9장 [해방은 생활의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인생관이 변할 때 가능하다] 중에서


국가 권력을 옹호하는 자들은 “국가의 권력이 폐지된다면, 더욱 악한 자들이 덜 악한 자들을 억압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집트인이 유대인을 정복했을 때, 페르시아인이 이집트인을 정복했을 때, 마케도니아인이 페르시아인을 정복했을 때, 로마인이 그리스인을 정복했을 때, 바바리아가 로마인을 정복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 모든 정복자들이 언제나 피정복자들보다 선량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의 국가 안에서 어떤 한 개인으로부터 다른 개인으로 권력이 전환될 때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언제나 더 나쁜 사람에게서 더 좋은 사람에게로 옮겨졌는가? 루이 14세가 제거되고 로베스피에르가, 그리고 그 뒤 나폴레옹이 권력에 올랐을 때 과연 어떤 자가 통치했는가? 더 선량한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더 나쁜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과연 언제 선량한 자가 권력을 쥐고 있었던가? 베르사이유 당인가 아니면 파리코뮌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인가? 아니면 찰스 1세가 통치자일 때인가, 아니면 크롬웰이 정부 수반이었을 때인가? 표트르 3세가 차르였던 때인가, 아니면 그가 살해되고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의 절반을 통치하고 푸가초프가 나머지를 통치할 때인가?
그렇다면 어느 쪽이 악랄한 쪽이고 어느 쪽이 선량한 쪽인가?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권력이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월등히 선한 자로서 다른 선한 사람들을 악한 자들로부터 보호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통치는 결국 폭력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 위에 군림하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힘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는 그런 힘이 행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결국 통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행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 것, 즉 악한 일을 다른 이들에게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_10장 [가장 악한 자는 권력자다] 중에서


문제는 진리의 인식 여부다. 그 진리가 우리에게 아무리 진부해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또한 위선과 최면적 암시에 걸려 엄청난 혼란에 빠지더라도, 지금 그 무엇도 이처럼 단순하고 명료하게 정의된 진리의 확실성을 파괴할 수는 없다. 어떤 외부적 조건도 우리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생활은 다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할 뿐이며, 여지없는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하게끔 당신을 오도(誤導)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유일하게 확실한 지침인 이성적 양심의 생활로 데려가주는 진리의 권능이 요구하는 것들을 부단히 성취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이성적이며 불가능한 권능이 우리가 몸담은 세속적이고 외부적 생활의 조직-사회나 국가의 생활에 따른-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 이유다. 그 권능은 우리에게 오로지 이성적이며, 확실하며, 가능한 것인 신의 나라를 섬기라고 요구한다. 즉,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가능한 한 최대로 화합한 가운데 이런 생활을 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이는 오로지 진실 안에서 인류의 화합을 추구하고, 권능 안에 있는 진리를 인식하고 믿을 때에 가능하다. 인간 삶의 유일한 의미는 신의 나라 수립에 기여하며 인류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모든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고, 이를 믿는 가운데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_12장 [반성하라] 중에서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저자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제정 러시아의 작가ㆍ사상가(1828~1910). 남러시아 툴라 근처에 있는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백작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평생 유한(有閑) 사회의 생활을 부정하는 모순 속에 살았다. 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소설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 등이지만, 톨스토이의 진면목은 『참회』,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이 비판적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사상을 담아낸 일련의 저작에서 더 잘 드러난다. 흔히 ‘인류의 교사’라 불리는 톨스토이는 실제로 가난한 농노들의 자제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 각자가 자신만의 창조적 개성을 찾아가도록 돕는 데 헌신했다. 그는 자연에 반하는 모든 것을 인위적인 것이라 하여 싫어했는데, 특히 국가ㆍ교회ㆍ학교ㆍ기계ㆍ문명ㆍ폭력ㆍ전쟁 등이 자연과 대척점에 있다고 여겼다. 또한 대세나 시류, 상식이나 일반적 경향이 자신을 죽인다고 생각하여 러시아 문학의 주류와 문명 중심 사상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하지만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비인격적인 사법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와 여성의 인격적 자유를 부정한 점, 황제 제도를 옹호한 점 등에는 비판의 여지가 남아 있다.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 『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의 짧고 교훈적인 소설들과 『교의 신학 비판』,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어라』, 『어떻게 전쟁을 끝낼 것인가』 등의 저작이 있다.


박홍규

역자 박홍규는 법학자이자 인문ㆍ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 영남대학교 법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사카 시립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법대ㆍ영국 노팅엄 대학교 법대ㆍ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교에서 연구했으며, 오사카 대학교ㆍ고베 대학교ㆍ리츠메이칸 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인 그는 전공뿐만 아니라 현대 정보사회에서 절실히 요구하는 인문ㆍ예술학의 부활을 꿈꾸는 르네상스맨으로 통한다. 저서로 『함석헌과 간디』, 『내 친구 톨스토이』, 『걸리버를 따라서, 스위프트를 찾아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자유인 루쉰』, 『독서독인』, 『아나키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처음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목차

옮긴이 해제
머리말

제1장 ‘권력의 악행에 대한 무저항’의 사상사
퀘이커파의 무저항 사상 | 게리슨의 무저항 사상 | 발루의 무저항 사상 | 발루의 무저항 교리 문답 | 헬치츠키의 무저항 사상 | 디몬드의 무저항 사상 | 무서의 무저항 사상 | 러시아의 양심적 병역 거부

제2장 ‘권력의 악행에 대한 무저항’에 관한 비판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종교적 비판의 무책임성 | 진실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직자와 당국의 잘못된 태도 | 여러 비판의 공통된 문제점 | 러시아 자유사상가들의 비판 | 외국인 자유사상가들의 비판 | 자유사상가들이 오해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제3장 기독교도의 기독교 오해
대다수가 오해한 기독교 교리 | 그리스도 최초의 가르침 | 교회에 의한 기독교의 신비화 |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웠을 리 없다 | 교리 문답에 따른 교회의 정의 | 교회는 언제나 여럿이고 서로 적대적이다 | 이단이란 무엇인가? | 이단에 관한 아놀드의 견해 | 교회들은 인민을 분열시키고 기독교에 적대적이다 | 러시아 교회가 하는 일 |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 | 러시아 정교회는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숨긴다 | 다른 나라 교회도 마찬가지다 | 교회 교리를 파괴하는 현대 생활의 외부 조건 | 교회의 최면술과 기만술

제4장 학자들의 기독교 오해
종교란 무엇인가? | 세 가지 인생관 | 기독교적 인생관에 대한 학자들의 오해 | 기독교의 무저항 교리에 대한 학자들의 오해 | 학자들이 주장하는 사회적 인생관과 신적 인생관의 차이 | 학자들의 첫째 오해_실천 불가능성 | 산상수훈의 다섯 가지 계율 | 학자들의 둘째 오해_신에 대한 봉사를 인류에 대한 봉사로 대체 | 인류란 무엇인가?

제5장 생활과 양심의 모순
생활을 바꾸어야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있다 | 기독교적 인생관은 생활의 진행에 의해 필연적으로 선택된다 | 빈부 갈등의 경제적 모순 | 정치적 모순은 더욱 심각하다 | 국제적 모순과 동시대인에 의한 인식_코마로프스키, 페리, 부스 | 국제적 모순과 동시대인에 의한 그 인식_파시, 로슨, 윌슨, 바틀렛, 디푸르니, 모네타

제6장 전쟁 비판
생활과 양심의 모순 | 평화회의 | 맥심 드 캄프의 주장 | 중재 법정의 가치와 군대의 감축 | 모파상의 전쟁관 | 로드의 전쟁관 | 두스의 전쟁관 | 클라레티의 전쟁관 | 졸라의 전쟁관 | 드 보그의 전쟁관

제7장 병역의무의 문제
병역의무는 사회적 인생관에 내재된 모순의 극치다 | 권력의 기초는 신체적 폭력이다 | 권력은 폭력을 수행하기 위해 특별한 기구를 필요로 한다 | 노동자 대중에 대한 권력의 태도 | 카프리비의 연설 | 군대는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 | 병역의무는 국가가 보존해야 하는 사회생활의 이로움을 파괴한다 | 국가는 과연 필요한가? | 국가에 대한 불복종과 복종의 비교

제8장 무저항 수용의 필연성
기독교는 새로운 인생관으로 소수에 의해 인정되었다 | 무저항 수용의 필요성에 대한 예언 | 분쟁을 조정하는 두 가지 방법 | 예수의 가르침_권력의 악행에 대한 저항 금지 | 폭력을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_협박, 매수, 최면, 군사적 강압 | 국가 폭력은 폭력적 국가 전복으로 억제될 수 없다 | 권력의 악행에 대한 저항과 무저항의 문제 | 구원의 시기와 방법 | 이교적 인생관의 사회는 반드시 사라진다 | 현대 모순의 극치인 징병제 | 이교적 생활은 극한에 도달해 전멸할 것이다

제9장 기독교적 인생관의 수용이 유일한 해방
기독교인의 외부적 생활은 아직도 이교적이다 | 인간은 오직 기독교를 통해서만 권력으로부터 해방된다 | 해방은 생활의 외부적 조건이 아니라 인생관이 변할 때 가능하다 | 국가에 의한 물질적 상태의 변화라는 구원 추구는 잘못된 것이다 | 인민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 | 인민의 자유는 오로지 개인의 자유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 러시아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 다른 나라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 | 충성 선서, 세금 납부, 통행권, 경찰의무, 병역의무에 관한 러시아인들의 불복종

제10장 국가는 필요 없다
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 | 기독교인의 국가 불필요론 | 보수주의자의 국가 옹호론 | 가장 악한 자는 권력자다 | 권력자의 변명 | 폭력은 기독교에 의해 감소된다 | 외부적 방법에 의한 진리 인식 | 여론과 폭력 | 소위 야만인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 | 범죄자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 |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제11장 기독교적 인생관이 폭력을 끝낸다
폭력은 여론으로써 파괴될 수 있다 | 상류 계급의 변화 | 폭력 기관의 변화 | 폭력적 국가 기관을 두어야 하는가? | 『벌거숭이 임금님』의 이야기 | 구원은 인민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제12장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폭력에 기초한 특권 | 군대 | 권력의 노예에서 탈출하라 | 과학적 개선 방법의 문제점 | 참된 자유 |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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