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일깨우다!
이 책의 주제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협동조합에 관한 우리의 정체성’이다. 만들어진 대상에 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주체에 정체성이 있다. 목적어를 주어로 여기는 전도된 사고야말로 소외된 의식이고, 이런 의식을 통해서는 소외를 극복할 주체도, 소외를 극복할 대안도 찾아지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의 정체성’은 결국 ‘나의 정체성’에서 나온다.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말을 찾고 다른 조합원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내가 나임을 자각하는 것, 내 존재의 가치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정받는 것, 이로 인해 내가 살아가는 의미와 힘을 갖게 되는 것, 이런 하나하나의 내 정체성이 모여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갈 때, 비로소 협동조합도 자기만의 고유한 특징과 본질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다시,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에게 향해 가는 협동조합
지난 2021년에 제33차 ICA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협동조합 정체성에 깊이를 더하다(Deepening our Cooperative Identity)”라는 주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과연 “협동조합 정체성에 깊이를 더하다”라는 말이 말이 될까? 다른 건 몰라도 영어 ‘our(우리의)’는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난 서울대회 때의 의제는 “협동조합 정체성에 깊이를 더하다”가 아니라 실은 “우리의(our) 협동조합 정체성에 깊이를 더하다”이다. 이 둘은 비슷해 보여도 전혀 다른 말이다. ‘협동조합 정체성’이 협동조합만의 고유한 특징과 본질을 말한다면, ‘우리의 협동조합 정체성’은 협동조합에 관한 우리의 집합적인 통찰을 말한다. 이런 우리의 통찰에 깊이를 더하자는 것이지, 협동조합의 특징과 본질을 더 심화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커다란 오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협동조합에 관한 잘못된 인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보통 협동조합을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고, 이를 규명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실체가 없고, 협동조합에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사람들의 말과 관계뿐이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은 실은 협동조합에 관한 우리의 말이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다른 이와의 관계이지, 협동조합 자체의 어떤 특징이나 본질이 아니다. 하다못해 협동조합을 사업체 위주로 바라보는 유럽인들조차 그 정체성만큼은 사람의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는 사람을 빼고 실체도 없는 협동조합에게 자기 본질의 통찰을 요구하고 있다. 소외의 극복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은 소외된 의식의 늪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이념적 위기’를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1980년 레이들로 보고서에서 이 용어가 처음 제기된 이래로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그 위기가 극복되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왜일까?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위기의 설정 자체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협동조합에게 ‘이념’이 웬 말인가. 이념의 소유주는 ‘협동조합’이 아니라 ‘사람’이다. 소위 협동조합의 이념이라 이야기되는 모든 것이 실은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사람들의 말이고 신념이다. 만들어진 협동조합에 이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신념이 있고, ‘협동조합의 이념적 위기’는 실은 ‘협동조합에 관한 우리들 생각의 위기’라 해야 옳다. 즉, 협동조합이 초창기 자기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위기가 초래된 것이 아니라, 조합원이 자기 말과 관계를 잃어버리고 따라서 더는 그 안에서 존재의 의미도 삶의 희망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 위기의 본질이다. 초창기 협동조합으로 돌아간다고 위기가 극복될 일이 아니라, 조합원이 자기 말과 관계를 다시 찾아 드러낼 때 비로소 그 해결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협동조합의 이념적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먼저 조합원이 자기 말을 되찾고 다른 조합원과 다시 관계 맺도록 돕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협동조합의 정체성에 진정으로 깊이를 더하려면, 먼저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기 정체성부터 그 깊이를 더하도록 돕는 게 우선이다. 조합원에서 협동조합으로 그 주어가 전도된 우리의 의식을 협동조합에서 다시 조합원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나아가 이런 조합원이 조합원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돌아가 다른 한 사람 한 사람과 꾸밈없이 관계할 수 있어야 협동조합의 위기도, 협동조합에 대한 우리의 낯섦도 진정으로 넘어설 수 있다. 진리를 무시하고 이념을 비하하면서 기업의 말로써 조합원을 현혹하는 협동조합은 이미 협동조합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이에 비하면 진리를 추구하고 이념을 강조하면서 협동의 말로써 조합원들에게 다가가는 협동조합이 훨씬 협동조합답다.
“저자의 특별히 덧붙이는 말”
“지난 10여 년에 걸쳐 나는 도서출판 들녘의 도움으로 협동조합 관련한 세 권의 책을 낼 수 있었다. 첫 번째 『깨어나라! 협동조합』은 국가와 자본이 지배하는 속에서 인간의 협동을 환기하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사회적 경제란 무엇인가』는 그 협동의 대상을 동질적인 인간에서 이질적인 생명으로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비해 새로 선보이는 『‘한 사람’ 협동조합』은 이런 인간의 협동과 그 확장이 결국에는 한 사람으로 다시 행해야 함을 밝히기 위함이다. 이로써 협동조합 관련 3부작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