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평>
회남 선생은 일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이 나라 경제발전을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허다한 업적을 남기시고 이 나라 근대사 최후의 증인으로 살아계시다. 이 평전은 청사靑史에 빛나는 자료가 될 뿐 아니라 후대의 귀감이 될 것이다.
- 남덕우,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전 국무총리)
어려운 시기가 많았지만 선생이 불만이나 불평을 토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끝까지 묵묵히 대인의 풍모를 지켜내시는 거목의 숨결을 느낄 뿐이다.
-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전 국무총리)
선생은 르네상스 시대 등장했던 ‘토털 맨’이라 할 수 있다. 가장 이른 나이에 입신해 가장 늦게까지 ‘일’의 세월을 보냈다. 본인의 영민함과 노력과 함께 조국의 운명이 이를 재촉했다.
- 김진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전 과학기술처장관)
국제로타리 이사와 재단관리위원을 역임하신 선생은 본인이 원하시고 조금만 연부역강하셨더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로타리 회장을 하셨을 것이다. “내가 10년만 젊었더라면…….”하고 아쉬워하시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 배도, 효성그룹 고문(전 재무부 차관보)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
시련과 역경을 헤쳐 온 백년의 열정,
위대한 이코노미스트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대한민국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다
대한민국 역사의 좌표를 보라. 절대빈곤으로 허덕이던 최빈국의 시점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의 현시점을 잇는 가파른 선을 되짚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한 명의 거대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 경제의 초석을 다지고 부흥과 성장의 기틀을 만든 회남淮南 송인상宋仁相이다.
해방 후 존폐위기에 처한 식산은행의 심사부장을 맡아 어느 정도 정상화하는 데 성공한 송인상은 1949년 신생 대한민국의 세 번째 이재국장으로 정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경제를 안정시킬 정책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송인상은 안정을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최대한 줄이고, 은행들은 수신한도 안에서 여신을 주도록 하고, 귀속재산의 처리과정에서 생기는 부정부패를 막는 것을 골자로 한 ‘경제안정 15원칙’을 만들었다. 또한 건국국채를 발행하여 재정을 확충하고 재정과 금융의 중추기관인 한국은행을 설립했다.
그러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안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6·25 전쟁이 발발했고 송인상은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돌파구를 찾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외교는 전쟁의 또 다른 이름
송인상은 숱한 협상테이블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물자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으로부터 물자를 들여오는 한일무역회담을 주도했는가 하면,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IMF와 IBRD에 문전박대 당하거나 바람맞기 일쑤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입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송인상이 IBRD의 까다로운 융자조건을 개선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부흥부장관 겸 경제조정관으로서 맞닥뜨린 원조당국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들은 언제나 주는 대로 받으라는 식의 고자세를 유지했지만 송인상은 원조를 받는 입장에서도 비굴함을 보이지 않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진정성으로 상대를 대했으며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송인상의 경제외교는 박정희 정부에서도 빛을 발했다. EC대사로 임명되어 대對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끌어올리는 목표를 조기에 달성한 것이다.
자립경제의 선구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거저 주는 원조에서 차관으로 빌려주는 지원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송인상은 원조의 황금시대가 저물어가는 것을 예감하고 홀로서기를 준비했다.
해외연수를 통해 배우고 터득한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원조당국을 설득해 멀리 내다보고 경제개발을 추진할 산업개발위원회를 설립한 후 선진국의 지식과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마침내 경제개발3개년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그러나 국무회의를 통과한 지 며칠 만에 4·19가 일어나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 이 계획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구체화되어 실현되었다.
고독한 ‘아담 스미스’
나라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송인상에게는 화려했던 순간보다는 고독했던 순간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고독함 속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할 수 있었던 것은 조국과 국민, 그리고 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조국의 국민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원조당국에 더 많은 돈을 달라고 사정하는 처지에서도 협상테이블에 놓인 태극기처럼 당당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은 힘들 때마다 의지를 일으켜 세웠으며 그 의지는 마침내 기적을 이루게 했다.
인재를 키운 인재
송인상은 격동의 시기,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치열한 현재를 살면서도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에 급급하기 보다는 더 늦기 전에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원조 자금의 상당 부분을 교육에 쏟아 부었다. 가난한 조국의 현실을 벗어 던지려면 기술을 개발하고 산업을 일으킬 인재들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네소타대와 서울대의 제휴를 성사시켜 서울대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고 대학에 경영학과가 전무했던 시절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를 신설함으로써 전국 대학에 경영학과 설치 붐을 일으켰다.
재무부장관 시절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공채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하고 공무원 연금제도를 만들어 시행했다.
송인상이 키운 일꾼들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1960~1970년대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는 언제나 청춘이다
1세대 뱅커로, 건국의 주역으로,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다진 개척자로, 장관으로, 외교관으로, 기업가로……. 송인상의 인생은 그가 살아온 격변의 시대만큼이나 파란만장했다.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장남으로, 원조를 받아야 하는 최빈국의 책임자로, 정치적 풍랑 속에서 외로운 이코노미스트로 살아야 했다. 그 속에는 꿈과 좌절이 있으며 재기의 도전도 있다. 환희와 고통이 공존했고, 눈물과 반성, 고뇌와 깨달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