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당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회수에 관심을 갖자
대한민국의 글자인 훈민정음은 누가 봐도 뼈를 맞추어 놓은 듯 써진 반듯한 글체가 분명하다. 처음 세종대왕이 글을 만들 때 그 글자체를 한문에서 찾았고 백성들이 가장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를 창제하셨다. 그런 글자체가 송설체다. 그리고 조선 왕조를 통틀어서 가장 송설체를 잘 쓴 사람이 안평대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송설체라고 하지 않고 안평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요절한 안평대군의 글자는 세상에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의 글 자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확실한 그의 글자체가 보존된 게 있다.
그게 바로 몽유도원도이다. 비록 그림은 안견이 그렸다고 하지만 그 그림을 보고 안평대군이 직접 썼다는 발문이 그 그림과 함께 있다. 안평대군의 글뿐만이 아니다.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집현전의 학자들, 그 당시 우리글을 만들 때 참여했던 모든 사람은 세종의 명에 따라 송설체, 그 유명한 안평체만을 사용했다고 한다. 집현전의 학자들, 성삼문, 신숙주의 글씨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그 그림을 찬양하고 그 내용을 몽유도원도와 함께 기록해 두었다. 그래서 그 그림은 여러 사람의 글만을 길게 늘어놓으면 23미터나 된다고 한다.
프랑스에 있는 규장각 도서는 그래도 정부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규장각 도서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몽유도원도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그 그림의 가치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부활시키고 져 이 소설을 썼다.
역사적 사건은 좀 장황하게 전개되기도 했지만, 등장인물은 지금 현존하는 사람이나 고인이 된 분들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코피리도, 달중이도 모두 실존인물이다. 소설이 완성되고 실제로 달중이는 살아 있음을 확인했지만 코피리는 아마 돌아가시지 않았나 싶다. 다만, 조폭과 관련된 이름은 실명을 사용하기가 곤란했다. 지금은 이미 실형을 마치고 나오기도 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전반부는 암시나 설정 때문에 다소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런 지루함을 없애려고 조폭들 이야기, 그리고 포르노 수준의 야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출품작이라는 걸 고려해서 모두 삭제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지루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부분을 지우면 그 설정을 지움으로 인해 뒷부분을 찾아 또 지워야 했다. 그래서 긴 장편이 그렇게 길지 않은 장편으로 변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의 책으로 만들기는 다소 무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 수필 하나 써 보지 않았던 내가 소설부터 시작한 까닭에 거창하게 프롤로그 와 그리고 에필로그까지 써 붙였다. 그걸 쓸 기회가 이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출품작으로 보내기엔 내가 생각해도 많이 부끄럽고 유치하다.
나는 1980대 후반과 그리고 1990년대 초반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그 아슬아슬했던 시절의 한 부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과연 우리가 배우고 봐왔던 그 역사의 반목을 왜 또 해야 했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또는 앞으로도 이 땅에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문맹률이 낮고 많은 시간을 학문을 위해 정진하는 거대한 집단지성으로 뭉쳐진 우리나라는 이제 이런 사상적 틀에서도 더욱 진일보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원하는 국민의 바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으로 양분된 우리 국민의 사상적 틀을 뛰어넘어 똑같이 모두가 하나의 사건이나 어떤 상황에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품고 안아야 할 전통과 문화유산이다. 이것에는 다른 여타의 사상적 이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조직적인 집단문화나 중국처럼 수억 인구가 바라는 영웅 상이 없다. 차라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상 풍상을 한몸에 지고 어렵게 살다가 기어이 일어서는 해피엔딩에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한다. 우리에게는 가해자보다는 오직 피해자의 처지에서 늘 슬픔을 함께하며 카타르시스를 풀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슬픈 경우를 보거나 직접 겪을 때 우리에게는 어떠한 사상적 틀도, 자신의 가치를 잊게 하는 무소속의 소외감도 잊어버린다.
나는 이런 우리 민족이 하나의 시선으로 집중할 수 있는 소재로 우리의 문화재를 선택했다. 몽유도원도가 그것이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다는 이상향을 안견이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실제적 가치가 천억이 넘는다고 한다. 나는 이 그림이 단순히 그 천억이라는 금전적 가치에서 보지 않았다. 최소한 대한민국의 글자인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우리 선조의 그 기치와 세종대왕의 사려 깊은 미래지향적 사고를 독자 제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을 뿐이다. 또 몽유도원도의 가치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한곳으로 부활시키고 져 이 소설을 썼다. 소설의 시대적 상황이 정치적으로 양분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그 시절을 뒤늦게라도 질타하는 우리 세대와 그리고 다시는 그런 역사적 상황이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기도 하다.
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우리의 문화유산이 아직도 일본에 있고 그 문화유산은 대한민국 국민이 꼭 회수해야 하는 자존심을 심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 땅에 심어 주어야 할 자긍심은 경제를 발전시켜 잘사는 민족이 아닌 문화가 있고 뼈대가 있는 족속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우디나 중동국가들을 선진국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문화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이다.
불에 타버린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어쩌면 600년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살신성인이다. 조상들의 메시지가 분명하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문화재에 다시 한 번 혼을 불어 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