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블루문’과 연작입니다.>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인 각박한 현실 속에 살아가는 여자, 차세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열일곱의 첫사랑을 가슴 속에 품고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간다.
고된 현실 속에서 갑자기 찾아온 추억의 편린은 너무나 빛나서 현실조차 잊게 만든다.
그녀의 인생에서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이나 다름없었던 그 남자, 정유현.
다시 한 번 꿈을 꾸고 싶어지게끔 만드는 그를 가지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인기 절정의 아이돌 ‘데스틴’의 멤버, 정유현.
덧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위해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인지 조차 혼란스럽다.
우연히 찾아낸 첫사랑, 차세나 만이 그의 심장에 뚫린 구멍을 메울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아버렸다.
하지만 그의 파랑새는 잔뜩 부푼 꿈만 안겨 주고 잔혹하게 다시 날아가 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의 파랑새를 찾는 유일한 방법.
유현이니까, 유현이라서 할 수 있는, 그녀를 찾을 마지막 방법, ‘첫눈 오던 날’.
-본문 중에서-
“너 여기 있으면 안 돼, 정유현. 너, 가.”
“……왜?”
어눌한 말투로 이유도 없이 가라고 채근하는 세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유현이 물었다.
내가 네 곁에 있으면 안 되는 이유를 제대로 대봐, 차세나. 이번에야말로 정말 날 제대로 설득할 만한 이유를 대 보란 말이다.
“아무튼, 안 돼.”
이미 어지간히 취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세나는 확실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아니, 술에 취해 있지 않더라도 유현을 설득할 만할 제대로 된 이유 따윈 없을 것이 분명했다.
“……거짓말쟁이 차세나.”
고개를 내젓다가 취기가 다시 밀려오는지 제대로 목도 못 가누는 그녀에게, 유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너, 나 좋아하잖아. 근데 왜 자꾸 가라 그래?”
거짓말쟁이라는 말에 발끈했는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던 세나는 뒤이은 유현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을 연신 깜빡이는 세나가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누, 누가 그러는데? 나 너 안 좋아해.”
“웃기시네. 문에는 데스틴 포스터 붙여 놓고, 즐겨찾기에는 데스틴 공식 홈도 모자라 팬 페이지가 즐비한 사람이 참 할 소리다?”
“.너 아닌데? 나 너 말고, 재희 좋아해.”
“흐음…… 차세나 취향을 내가 참 잘 아는데, 재희는 아닌 것 같은데?”
애써 부인하는 세나의 표정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이 바보, 차세나. 넌 네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줄이나 알아?
이 머저리 같은 정유현. 넌 왜 진작 이 눈을 읽지 못했단 말이냐.
갖고 싶은데, 너무나도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해서 애달아 있는 그녀의 열망, 그 와중에도 그를 애써 거부해야만 함으로써 발생하는 그녀의 모순을, 괴리를 어째서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보고 싶어 했으면서 자꾸 가라고 해?”
한 걸음. 유현은 세나에게 정확히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세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등에는 문이 닿아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곳으로 그녀를 몰아넣고서, 유현은 세나를 채근했다.
대체 이유가 뭐야. 왜 그런 얼굴을 하고서는, 나보고는 자꾸 가라고 하는 거야. 네가 나를 밀어내는 이유가 대체 뭔데.
“……아, 안 보고 싶었다고 했잖아.”
“자꾸 거짓말할래? 내 눈 똑바로 보면서 다시 말해 봐.”
이 와중에 말을 더듬으면서까지도 세나는 자신의 감정을 부인했다. 한 걸음 살짝 더 다가서며, 유현은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시 말해 보라 종용했다. 이윽고 흔들리던 세나의 시선이 유현의 눈에 닿으며 정확히 멈추었다.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 더 이상 세나는 유현을 거부하지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해.”
마지막까지 물러설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세나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유현은 자신이 있었다. 그 어떤 기만도 거짓도 허용되지 않는, 지금 바로 이 순간만큼은 세나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세나가 유현을 밀어내던 때, 차마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무서워서 더 이상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만약 그때 유현이 좀 더 성숙했었더라면 결코 뛰어난 연기자가 아닌 세나의 거짓을 꿰뚫어 보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당시 유현은 너무 어렸었다.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는 세나에게 조금 더 다가가 당황한 듯 계속 깜빡이던 그녀의 눈꺼풀이 서서히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거봐, 넌 내가 싫지 않잖아.
그제야 마음이 놓인 유현은 미소 지으며 살며시 세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듯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노크하자, 그녀가 살며시 문을 열어 주었다. 마침내 유현에게 열린 그 문 안에 들어서며, 그는 눈을 감았다. 강하게 유현을 거부했던 그 입술은 결국 유현을 수줍게 맞이했다.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온도가 그를 금방이라도 녹여 버릴 것 같았다. 분명 아주 살짝 발을 디딘 것 같은데, 늪에 빠진 듯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깊게, 조금 더 깊게 그녀에게 빠져 버렸다. 사혈이 흘러나오는 구멍 난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그의 첫사랑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아팠던 걸까.
세나가 결국 유현의 목을 끌어안았을 때, 그는 비로소 그랬어야만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갖기엔 그가 너무 부족해서, 눈이 어두워서, 그래서 그 오랜 시간을 절망 속에 떠돌며 살아야 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파랑새는 처음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그를 바라보며, 그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결코 들리지 않을 노래를 소리 없이 부르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찾아낸 새장의 문을 열고, 마침내 유현은 자신의 파랑새에게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