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연이 시후에게.
“내 첫사랑은 열일곱 살 때였어요. 주인집 오빠가 데리고 오는 대학생 오빠였어요. 너무 잘 생겼었거든요. 어린 나이에도 그 남자의 입술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하며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죠. 내 두 번째 사랑은 대학 교수님이었어요. 그 사람이 지나가면 여학생들이 자기들끼리 꺅꺅거리며 배배 몸을 꼬을 정도로 시크한 매력이 있는 교수님이었거든요. 아픈 과거가 있는 남자였는데, 그 아픔을 내가 어루만져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용기가 없어서 피해만 다녔죠. 그리고 내 세 번째 사랑은 지금 현재진행형 인데요. 이 남자, 생긴 것만큼이나 얼마나 달콤한지 몰라요. 이 나이쯤 되니까 바라만 보는 사랑은 싱거웠는데, 이 남자는 내 상상을 항상 그 이상으로 충족시켜줘요.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고……. 남자는 인물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는데, 인물도 좋고, 능력도 있고, 뭐 내가 비교치가 없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밤기술도 최고인 것 같아요. 이런 남자 놓치면 후회하겠죠? 첫 번째 남자, 두 번째 남자는 고백도 못 해보고 놓쳤으니까 이번엔 용기내서 고백해 볼까요?”
-시후가 화연에게.
“열일곱의 화연이 사랑하던 대학생은 이성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 그건, 외모만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의 한심함에 질려버렸던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 대학생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대학생 화연이 사랑했던 교수는 세상에서 무조건적인 자기편을 잃고 하루하루 덤덤히 살아가고 있었어. 그가 학회로 미국에 채류증일 때 교통사고를 당한 아내는 그가 오는 시간까지 기다려주지도 않더군. 항상 예쁜 모습,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더니, 사고로 엉망이 된 모습은 그의 기억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걸까? 마지막으로 화연의 현재진행형인 사랑은 올해로 서른셋의 남자야. 나름 굴곡 있는 삶을 살았지. 처남이었던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 10년 전 알았던 화연을 만났어. 그의 기억 속에 예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소녀였던 그녀는, 힘겨운 삶의 무게에 휘청거리고 있었지. 그녀가 내뱉는 거친 말들은 스스로의 상처를 감추기 위함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어……. 서른셋의 권시후가 스물일곱 차화연의 첫 남자가 되었어……. 그는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뿐이야. 지금 그의 가장 큰 바람은 남은 생을 화연과 함께 살아가는 거야. 화연이 첫 번째, 두 번째 사랑에서 아팠던 만큼, 이 마지막 사랑에서는 그녀가 주고 내가 받는 것보다, 내가 주어 그녀가 행복할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어.”
-본문 중에서-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하지만 넌 그때 나이가…….”
“어리다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더더욱 이럴 순 없지 않아?”
“훗, 설마 아직까지 그 감정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감정이 남아 있든 남아있지 않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난 너를 안을 생각이 없어.”
“몸은 다른 말을 하는데요?”
화연이 다시 다가와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반박했다. 시후의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일단은 나도 남자니까.”
시후가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리며 씁쓸히 내뱉었다. 이렇게 언쟁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남성은 점점 더 부피를 늘리고 있었다.
“안아줘요. 적어도 내 처음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도와줘요.”
“아주머니 병원비, 내가 빌려줄게. 졸업하고 취직해서 갚아. 그럼 너의 처음은 정말 사랑하는 남자와 할 수 있겠지.”
“안기에……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어요?”
“아닌 거 알잖아.”
“그럼 더 이상 여자인 내가 사정하게 하지 말아요.”
화연이 명령처럼 속삭이고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오늘 이 남자를 갖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시후는 그녀의 입술을 받아주지도,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제풀에 지쳐 그녀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듯 했다. 그것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투지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르는 걸까. 화연은 열리지 않는 입술을 벌하듯 그의 아랫입술을 물어버렸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났어도 멀기만 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이 용서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지금의 그녀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주르륵, 감긴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이 되었다.
서러운 걸까. 화연이 몸으로 부딪혀오는 애원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은 그를 벌하듯 입술을 물어버렸을 때만 해도 날카로운 아픔에 움찔 했을 뿐, 결심을 바꾸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바꾼 것은 멍든 볼 위로 흐르는 눈물 때문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젖어드는 모습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 순간 희재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며 그의 결심을 부추겼다. 그는 결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화연의 허리에 팔을 둘러 당겨 안으며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뒷목을 받혔다. 그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입술을 떼는 화연에게 그가 건넨 말은 끝이 아닌 시작의 말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지금 당신을 갖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거예요.”
물러서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 그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이를 드러내며 기뻐했다. 그가 그녀에게 물린 아랫입술을 핥으며 짓궂게 물었다.
“거친 거 좋아해?”
“거칠게 할 거예요?”
만만치 않은 그녀였다.
“훗, 한 마디도 지지 않는구나.”
“당신이라면, 거칠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
위험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존대와 반말을 오가는 그녀, 교수님이라는 호칭보다 당신이라는 호칭도 나쁘지 않지만, 그녀에게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면 너무 이른 욕심일까.
“그런 위험한 발언은 하는 게 아니야. 내 허리에 다리 감아.”
시후가 허리를 감았던 팔에 힘을 주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받쳐 안으며 명령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주었던 방이 아닌 자신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에 팔을, 허리에 다리를 감은 화연이 그가 방에 다다를 동안 코알라처럼 그에게 달라붙어 흔들렸다.
“고마워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귓가에 속삭이는 그녀를 향해 그가 대답했다.
“너만 나를 갖는 게 아니야. 나도 너에게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받아낼 거야.”
“꼭 사체업자 같아요.”
“이참에 고리대금업이나 해 볼까?”
“여기 셈에 밝은 여자 있는데 경리로 써줄래요?”
“직원도 구했겠다, 내일이라도 개업을 해야겠군.”
“킥킥.”
어느새 침대였다.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건넸던 농담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한 듯 무방비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예뻤다.
시후가 그녀를 침대 옆에 내려놓고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부, 불은 꺼 주실 거죠?”
“아니.”
“네?”
알몸으로 안아 달라 조를 땐 언제고, 이제와 빛을 부끄러워하다니.
시후는 당황하는 화연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탁자 위에 스탠드를 켜고 방의 불은 껐다. 대낮처럼 환한 형광등보다 조도가 낮은 스탠드 불빛이 아늑하게 두 사람을 감쌌다.
“오늘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 너의 오늘은 이 시간 이후가 전부인 거야.”
“빨리…….”
“후후, 겁 없는 아가씨네? 그럼 이것도 좀 부탁할까?”
시후가 그녀의 손을 잡아 가운 끈에 올려주었다. 그에 화연이 끈을 잡아당겼고 가운 앞섶이 열렸다. 드러난 그의 가슴에 그녀의 손길이 닿고 스르륵 가운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온전하게 알몸으로 마주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시후가 그녀를 당겨 안고 한손으로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입술을 포갰다. 열리지 않던 치열로 그녀를 안달 나게 했던 여유는 없었다. 장시간 알몸으로 공기 중에 노출됐던 화연의 몸이 차가웠다. 그가 잠깐 입술을 놓아주고 침대에서 이불을 걷어내고 그녀를 눕혔다. 한동안 두 사람에게 이불은 필요치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