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서전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수많은 진리실험 이야기를 해 보자는 것이다.” 간디의 이 말처럼, 그의 삶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실험하는 길이었다. 『간디자서전』에서는 성인이 아닌, 끊임없는 자기반성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간디를 만날 수 있다. 금욕과 자기절제, 진리추구의 이상 실현, 그리고 온 인도의 염원인 독립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온 세계를 감동시킨 강력한 비폭력의 삶!
진리를 실험하는 길에서 간디 영혼의 힘을 만나다!
당신 인생의 스승이 여기 있다!
위대한 영혼 간디
“오늘 일에 온 힘을 쏟고, 내일 일은 신께 맡기자.”
온 세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마하트마(위대한 영혼)의 이름으로 친숙한 간디. 동서양을 넘나들며 펼친 그의 활동은, 주권을 잃고 고통과 실의에 빠진 인도 국민들을 위한, 인류 역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참으로 경건한 희생이었다.
아플 때도 머리에 흙을 얹었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도의 흙에서 태어나 인도의 땅을 밟고 살았던 간디, 그에게는 농민적 풍모와 농민적 사고가 있다. 인도의 역대 정치가 중에 간디만큼 인도를 돌아보고 대중과 접촉한 사람은 없다. 인도 국민의 간디에 대한 존경과 인기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과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고독을 지키거나, 세상 모든 것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간디는 후자를 택했다. 간디라고 하면 먼저 비폭력, 그리고 힌두교?이슬람교 융화와 불가촉천민 해방이 떠오른다. 비폭력은 간디 평생의 사상과 행동을 관철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생애 마지막 날까지 간디가 항상 생각하고 속히 이루고자 했던 것은, 힌두교?이슬람교 융화를 통한 하나의 인도, 불가촉천민의 차별 폐지에 따른 평등한 인도의 실현이었다.
수많은 진리실험 이야기 『간디자서전』
“나는 자서전을 쓰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수많은 진리실험 이야기를 해 보자는 것이다.” 간디의 이 말처럼, 그의 삶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실험하는 길이었다.
「간디자서전」에서는 성인이 아닌, 끊임없는 자기반성으로 진리를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서의 간디를 만날 수 있다. 금욕과 자기절제, 진리추구의 이상 실현, 그리고 온 인도의 염원인 독립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간디는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겁 많은 아이였던 시절, 영국과 남아프리카에서 겪은 인종차별, 주위사람이나 가족, 특히 아내와의 갈등,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좌절과 고뇌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그를 더욱 경건한 존재로 돋보이게 한다. 그 밑바탕은 이처럼 평범하고 미숙하기에 그의 희생적인 삶이 더욱 빛나는 것이리라.
인도의 미래를 위해 영국에 봉사하다. 그러나…
간디는 보어전쟁에서, 인도인 야전간호부대를 이끌고 영국군에 종군했다. 그 뒤 줄루족의 반란 때도 간호부대를 이끌고 참가했다. 그때 그는 준위 계급이었으며, 뒷날 비폭력주의 때와는 전혀 다른 군복 입은 간디를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영협력’에 대해서는 간디에게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남을 돌보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인도인의 기본적인 인권옹호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을 영국숭배자의 ‘굴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 자신은 진정으로 영국인과 대등한 입장에 설 기회를 거기서 찾아내려 했음을「간디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도 같은 이유로 간디는 영국에 협력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은 이런 인도의 협력에 보답은커녕, 인도의 언론?사상?집회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하는 로울라트법을 시행했다. 간디의 전 인도적인 항영투쟁은 이 로울라트법 반대로 시작되었다.
순결한 생활, 브라마차리아
줄루족 반란 때 간호부대를 이끌고 영국군에 종군할 때였다. 한낮 40도가 넘는 뜨거운 태양 아래 하루 60킬로미터를 행군하는 고된 나날 속에서, 간디는 깊은 사색에 빠진다.
‘이제까지 자기억제가 자기실현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지 생각한 적이 있는가. 인류에 봉사하려면 자기억제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만약 가정생활의 기쁨에 도취되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에만 전념하면, 도저히 인류에 봉사할 수 없다. 우리―적어도 내게는 육체와 정신의 생활을 동시에 꾸려나갈 능력이 없다. 브라마차리아를 실행하지 않고서는, 가정과 국가에 동시에 봉사할 수는 없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자기억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브라마차리아는 육욕의 억제에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끝나서도 안 된다…….’
인생은 온갖 예술을 모두 모은 것보다 위대하고, 또한 항상 그래야만 한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란, 가장 완전한 인생을 영위하는 자다. 이 세상 온갖 아름다운 것들도, 고귀한 인생이라는 확실한 기반과 틀을 갖출 때에만 가치가 있다.
진리관철 싸움, 사티아그라하
자신을 억제하고 순결한 생활을 지키지 않고는 타인에게 봉사할 수 없으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으로 옮기도록 지도할 수도 없다. 그것은 간디에게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였다. 신념은 곧 힘이었다.
간디에게 몸을 순결하게 유지하는 것은 단순한 자?정화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직 그것으로만 천하의 진리를 붙잡고, 현대 세계의 악을 멸절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순결한 생활 다음에 오는 것은 진리 관철의 싸움이다. 즉, 진리관철 투쟁을 위해 자신을 순화하는 정진이 필요했던 것이다.
브라마차리아로 자기 자신을 단련하면서, 인도인을 단결시키고 조직하여 투쟁으로 이끄는 것이 간디의 사티아그라하였다. 사티아는 진리, 그라하는 굳게 고수한다는 뜻이므로 이는 비폭력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간디는 톨스토이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수동적 저항’을 떠올리고, 자신의 운동에 그런 의미의 구자라트어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간디가 말하는 비폭력은 단순히 폭력에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부정(비진리)에 대한 진리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간디는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에서, 진리 외에 달리 신은 없다고 확신한다.”
진리는 힘이다. 그것도 순결한 생활이라는 샘에서 펑펑 솟아나는 일종의 ‘영혼의 힘’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폭력은 약자의 무기가 아니라 강자의 무기이며, 두려움 없이 진리를 똑똑히 직시하는 용기이다. 현명한 인간은 악에 악으로 보복하지 않고, 항상 선으로써 악을 파멸로 이끈다.
진리에 대한 충성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했다. 그러나 힌두교와 이슬람교 갈등은 해결되지 못한 채 파키스탄이 따로 분리되어, 간디가 바라던 ‘하나의 인도’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간디는 독립 뒤에는 힌두교?이슬람교 화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극렬이슬람교도인 나투람 고드세의 총에 쓰러지고 만다.
간디의 주위에는 모든 세대의 희생적인 삶과 죽음이 겹겹이 가득 차 있다. 가정적인 간디였지만, 항상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간디 자신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 많은 희생들 중 하나가 되었다.
비폭력주의자 간디가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비폭력주의의 패배를 보여주는 것일까.
분명 비폭력주의는 많은 모순과 시대에 뒤떨어진 면이 있었다. 하지만 간디의 죽음은 그 신조를 넘어 인도의 민중에게, 그리고 온 세계 사람들에게 강력히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다.
간디는 비폭력과 단식의 서사시로 스스로 지은 생애의 마지막을, 더욱 극적인 죽음으로 장식했다. 이 극적인 마지막에 비추어 그의 극적인 생을 더듬어보라. 오직 ‘진리에 대한 충성’이었던 이 사람의 79년 생애가 무언 속에서 우리에게 숱한 교훈을 호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