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들레르《악의 꽃》 읽지 않고 어찌 시를 논하랴!
욕망이 넘실대는 처절한 서정의 아름다움, 그 영과 육의 극치!
인간 영혼의 은밀한 벌거숭이 호소《파리의 우울》
보들레르가 남긴 유일한 절창!
《악의 꽃》은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867)가 남긴 유일한 시집이다. 그 밖에도 《파리의 우울》, 《인공 낙원》 등 두 권이 있지만 전자는 산문시집이고 후자는 시적 산문집이어서 둘 다 순수한 의미의 시집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악의 꽃》에는 160편이 넘는 시가 실려 있다. 행 수(시구)로 치자면 대략 4200행이다. 이것이 보들레르가 평생 남긴 시의 총량이며, 창작 기간은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20년이다. 결코 많지 않은, 아니 이 적은 양에 독자들은 놀랄 것이다.
수록된 시 가운데 68편은 14행시(소네트) 형식의 소곡이다. 그 밖에도 14행에 못 미치는 시가 몇 편 들어 있다. 50행이 넘는 시는 15편쯤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긴 시는 146행의 「여행」이며, 이어 「저주받은 여인들」이 104행, 「평화의 담뱃대」가 97행이다. 보들레르는 결코 많은 작품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적게 쓰는 편이었다.
이 얼마 안 되는 시를 보들레르는 평생 다듬었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고, 흠 한 점 없는 완벽한 시구에서까지 ‘어색함, 억지스러움을 느껴 거듭 되새겨보며 온갖 작법을 시도했다(1869년 3월 10일자 편지).’ 그래서인지 《악의 꽃》에서는 노력의 흔적은 느껴져도 대충 한 구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읽어라, 근대 운문시의 최고 금자탑!
1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보들레르가 첫 시집 《악의 꽃》을 펴낸 것은 무려 20여 년이 지난 37세 때의 일이다. 보들레르는 일정 분량의 시가 모이지 않으면 시집 한 권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단순히 주제나 형식의 유사성이나 완성순서를 기준으로 시집을 엮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시집이 단순히 시를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통일성을 제대로 갖춘 것이라고 인정받고 싶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비범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1857년 6월 초판이 발행되고, 얼마 뒤 제2판이 발행되었다. “이 불길하고 차가운 미(美)의 책은…… 바이런의 시와 더불어 교양 있는 독자의 기억 속에 자리잡아갈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만족했으며, 위고와 플로베르를 비롯한 당대 문호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850년대 후반에서 1860년대에 걸친 시기는 근대사의 전환점이었다. ‘19세기 수도 파리’는 중세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던지고 정연하고 밝은 근대 도시로 나날이 빠르게 변모했다. 보들레르는 “이제 옛 파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네(도시의 모습은/애석하게도 사람의 마음보다도 빨리 변하는구나)(「백조」)”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 과도기에 선 것을 스스로 깨달은 시인은 이때, 영혼의 몽상에 깊이 침잠하여 처절한 서정의 아름다움을 낳은 《악의 꽃》 초판의 이른바 내향적 시인에서, 동시대 현실에 맞서서 그 급속한 변화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시를 이끌어내는 이른바 외향적 시인으로 스스로 변모했다. 재판이 있은 지 4년 뒤인 1861년에 완성한 《악의 꽃》 제2판에 추가된 시 32편은 그 결실이며, 시대의 현대성을 도입함으로써 작품에 신선함과 보편성을 주어 《악의 꽃》을 진정한 근대 운문시 금자탑이라 부르기에 걸맞은 위대한 시집으로 만들었다.
현대 상징주의 문학의 효시!
보들레르가 죽은 지 30년 뒤인 1896년에 비평가 레미 드 구르몽은 이렇게 말했다.
“현대 문학, 특히 상징주의로 불리는 문학은 모두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문학은 외면적 기법에서 볼 때 내면적ㆍ정신적 기법, 신비감, 사물이 발하는 언어에 귀 기울이고자 하는 마음, 영혼에서 영혼으로의 호응을 염원하는 점 모두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조용히 관찰하고, 자연에 내재된 세계를 상상케 하는 추론과 비교와 직유를 탐구하는 것, 그러기 위해 사실 파악 수단으로서 직감을 존중하고 한 발 한 발 자연에 다가가다가 마침내는 그것과 합체하는 것, 냄새와 색채와 소리로 동시에 자신을 표명하는 자연을 따라 별종인 예술의 결합을 꾀하는 것(예를 들어 시에 음악을 결합하는), 마침내는 이 신비한 추구, 무궁한 탐구로 사물의 겉모습이 관념과 일치하고 추상이 구상과 일치하는 영역에 이르는 것, 이것이 보들레르의 시작(詩作) 이념이며, 상징주의자로 불리는 1세대 젊은 시인들의 야심이었다.
인간 욕정과 감성의 실사적 묘사!
《악의 꽃》 제2판에서는 〈파리 풍경〉장이 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도시의 다양하고 추상적인 새로운 현실을 더 사실적이고 솔직하게 노래하려면, 형식을 제약하는 정형 운문시 형태는 알맞지 않다는 생각이 시인의 감성 안에서도, 사실주의로 기운 시대감각 안에서도 싹텄다. 이리하여 보들레르는 《악의 꽃》 재구성과 동시에 산문시의 독자성을 내용과 기법 양 측면에서 정밀하게 명확화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파리의 우울》은 《악의 꽃》처럼, 하나의 시집을 구상하고 그것을 오랜 세월을 들여 각고를 거듭하며 구체화해가는 과정을 거쳤다. 새로운 표현 형식을 채용함으로써 ‘평생 한 권뿐인 시집’이라는 원칙을 고수한 경위는 위와 같았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의식 속에서 자기 영혼의 종합적 표현과 다름없는 이 두 권의 시집은 어디까지나 하나였다. ‘《파리의 우울》은 《악의 꽃》의 짝으로서 만들어졌으며, 결국 그것도 《악의 꽃》(1866년 2월 18일 쥘 토르바에게 보낸 편지)’이었다. 또한 이 시점에서 그는 산문시집에 가까운 완성을 확신했으며 그로서는 드물게 자신감과 포부를 감추지 않았다.
일찌감치 보들레르의 신선함을 꿰뚫어보았던 방빌은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진정한 문학적 사건”이라며 칭찬했으며 그 뒤 베를렌, 말라르메, 랭보 등 수많은 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악의 꽃》 제2판 이후 보들레르가 만년의 모든 시혼을 쏟아 부은 것은 틀림없이 《파리의 우울》이며, 이것은 그가 창작 활동 마지막 단계에서 구상한 작품이 되었다.
마음 깊이 파고드는 아름다운 욕정의 운율!
보들레르는 살아 있는 동안에 《파리의 우울》을 간행하지 못했다. 지어야 할 시의 제목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배열 순서를 계획한 뒤 100편까지 완성하려고 생각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완성작은 50편뿐이었다. 이 산문시들은 그가 죽은 뒤인 1869년, 아슬리노와 방빌 교정으로 미셸 레비 서점에서 출판된 《보들레르 전집》(전7권) 제4권에 《소산문시》라는 제목으로, 그가 남긴 목차에 따라 수록되었다. 이 전집은 제목과 에필로그를 빼면 보들레르의 의도를 잘 존중했다고 평가된다.
비록 저자 생전에 출간되지는 못했지만, 《파리의 우울》 전체를 되풀이해서 읽으면 완성된 작품이 지니는 정합성과 몇 개의 주제가 다양하게 변주되는 한 음악으로서의 통일성이 느껴진다. ‘율동과 각운이 없는’ 이 언어의 음악은 ‘부드러운’ 협화음과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을 모두 갖고 있지만, 작가가 환기하는 ‘구불구불한’ 뱀의 이미지에서는 바그너의 무한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산문시를 창작할 때 보들레르가 무엇보다도 바랐던 것은 ‘마음에 깊이 파고들듯이’ 쓰는 것이었다. 나보코프는 “문학은 인간 영혼의 비밀스러운 깊은 곳에 호소하는 말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고스란히 《파리의 우울》에 적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