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예술 작품, 값비싼 보석뿐 아니라 뭇 여인들의 마음까지 훔치는 낭만적인 모험가!
그래서 파리 시민들은 그를 이렇게 불렀다. ‘괴도 신사 루팡’.
추리소설의 클래식 <아르센 루팡 시리즈>를 현대적인 번역까지 더해 리디북스에서 만난다!
화창한 봄날, 루팡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초록 눈동자의 아가씨를 만나 한눈에 반한다.
말 한 번 걸어보기도 전에 사라진 그녀는, 루팡이 탄 열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현장에 범인들과 함께 나타나는데!
루팡이 몇 번이고 위기에서 구해주지만, 그때마다 인사도 없이 달아나버리는 그녀.
초록 눈의 아가씨를 쫓던 루팡은 그녀를 이용해 엄청난 보물을 얻으려는 악당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루팡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초록 눈의 아가씨는 과연 살인범일까?
루팡은 그녀를 악당들의 손에서 구해내고 보물을 찾아낼 수 있을까?
라울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인 초콜릿 상자를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딱히 집중하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거기까지 간파해내시다니. 지금까지 열여덟 개나 드셨는데 말이에요.”
“꼭 얼굴을 찌푸리고 고뇌에 잠겨야만 생각이 되는 건 아니죠.”
“또 알아낸 게 있으신가요?”
“당신의 본명은 라울이 아니라는 것 정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진 영국 아가씨의 말에 라울의 표정이 이번에야 말로 굳었다.
“모자 안쪽에 새겨진 이니셜이 H. V네요. 친구 모자를 빌려 쓰고 다닐 만큼 남루한 행색도 아닌데…… 간단한 얘기 아닌가요?”
라울은 주도권을 계속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이 상황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 아가씨가 보기에 그 H, V라는 이니셜은 뭘 의미할까요?”
영국 아가씨는 열아홉 번째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글쎄요. 오라스 벨몽(Horace Velmont)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누굽니까?”
라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영국 아가씨 역시 미묘하게 웃었다.
“어떤 사람의 여러 가명 중 하나죠.”
“어떤 사람이라뇨?”
“아르센 루팡.”
라울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씨 말씀은…… 내가 아르센 루팡이라는 건가요?”
영국 아가씨는 초콜릿이 묻은 입술을 포개어 몇 번 비볐다. 라울은 대답할 시간을 벌기 위한 그녀의 처세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이 영국 아가씨는 보통 내기가 아니었다.
“글쎄요? 난 단지 당신 모자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말해준 거예요. 라울 드 리메지라는 이름은…… 아르센 루팡의 또 다른 가명인 라울 당드레지라는 이름과 비슷하기도 하고.”
라울은 두 손을 짝하고 마주쳤다.
“대단하군요. 내가 영광스럽게도 그 유명한 아르센 루팡이라니…… 재미있는데요?”
영국 아가씨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난 재미없어요. 당신이 아르센 루팡이라면…… 실망이거든요. 이렇게 간단히 걸리다니.”
그녀는 초콜릿 상자를 들어 올리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나 드실래요? 패배하신데 대한 위로예요. 전 이만 자게 내버려두시고요.”
“여기서 대화를 끝내자고요?”
“간단하게 파악 당해버리는 남자에겐 관심 없어요.”
“베이크필드 가문 출신의 미녀를 만났는데, 간단히 포기하면 사내가 아니지요.”
라울은 자신 역시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받아쳤다. 영국 아가씨는 빙긋 웃었다.
“내 이름은 매표소의 여행사 직원도 아는 걸요.”
라울은 두 손을 들었다.
“이런. 제가 졌군요. 갚아주지 않을 수 없겠는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말이죠. 전 그럴 생각이 없지만.”
영국 아가씨는 그 푸른 눈을 똑바로 들어 라울의 눈을 쳐다보았다. 라울은 그녀의 눈빛에 순간 숨을 멈췄다. 푸른 바다가 그녀의 두 눈 안에 통째로 들어있는 것 같았다. 지적이고도 아름다운 외모에 톡 쏘면서도 매혹적인 말투, 말을 걸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도도함, 라울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정말 신비로운 아가씨군요.”
푸른 눈의 아가씨는 흩어진 귀밑머리를 매만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전 그냥 평범한 아가씨에요. 콘스탄스 베이크필드. 아버지인 베이크필드 경을 만나러 몬테카를로로 가는 길이죠. 아버지는 거기서 저와 골프를 치려고 기다리고 계시고요. 음…… 보통 귀족집안 아가씨와는 달리 ‘리포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게 좀 특이하달까? 그러다보니 정치인, 고위 공직자, 사업가, 예술가…… 그리고 악명 높은 도둑까지…… 유명인들에 대해서는 웬만큼 알고 있을 뿐이에요.”
“……”
라울은 그녀가 ‘도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 미묘하게 웃어보이던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이만 전 실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