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로서 ‘道具的 理性’과 斯文亂賊으로서 저항적 異端
현대사회에서 異端은 흔히 종교적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이단은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이단이라면, 응당 主體思想이나 北韓을 의미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 또한 포함된다. 다만, 역사 안에서 이단에 대한 분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좇아, 이단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이단이 되는 변화가, 자연스레 찾아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이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작동하는 원리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이나 정치제도는, 조선왕조 말기 대표적인 이단이었다. 그래서 天主學을 이단으로서 처단한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나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것이 바로 역사의 政治性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말기에 천주학이라는 이단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고통은, 결국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老莊哲學, 佛敎, 陽明學 등을 선택했던 상황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從北으로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을 추종한다거나, 親中이나 親美에 대한 선택 역시, 자기의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목적하는 절대 다수의 서민대중으로서는,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할 까닭은 없다. 설령 그것을 선택하여 추종한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갈 것이며, 그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이단은 이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外交的 레토릭 쯤으로나 인식되는, 人權, 平和, 幸福, 正義, 共存, 主體, 革命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반드시 어느 편이든 선택하고 싶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어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적 이해가 없는 섣부른 선택은, 너무도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탓이다. 부득이한 탓에, 필자는 전통적으로 이단으로서 분별되던 학문을 주로 공부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따른 갖은 배척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단에 대한 비판이나 배척이 極烈했으며, 그러한 흐름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性理學이나 朱子學 이외의 학문적 이데올로기를 異端으로서 배척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기득권층인 왕실과 양반사대부가 추종하는, 통치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학문 이외의 학문을, 斯文亂賊의 학문으로서 규정하고 탄압한 것이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非但 조선왕조만의 현상은 아니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유용한 動力 중 하나가 곧 異端論理이다. 이단의 개념이나 대상은, 시대와 상황을 좇아 변화되면 족하다. 그렇게 시의적절한 개념을 정립하고서, 그에 해당하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먼저 그 대상을 결정하고서, 그에 상응하는 개념을 정립하는 경우도 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이단의 문제가 종교적인 행위로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종교적 포용마저도 일단의 이단에 대한 배척이 전제됨을 반증한다.
흔히 異端(heresy)은, 어떤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正統敎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주장에 대하여, 正統主義者 側에서 부르는 배타적 호칭이다. 여기서 정통주의자는 時流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삼는다.
근대 서양문화에서 횡행하던 ‘도구적 이성’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道具的理性(instrumentelle Vernunft)은, Max Horkheimer가 사용한 용어로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던 理性이, 이론적인 계산을 토대로,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제시하여, 인간 및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도구화되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본래 서구문명에서 인간존재의 이성은, 神의 역량에 버금하는 르네상스를 실현케 한 의대한 역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갓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이데올로기는, 애당초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이 당최 그릇될 리 없다.
그런데 최초의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얻어 세월이 흐르다보면, 恣意的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본래의 순수한 진실은 오염되어버리고, 그저 시대의 권력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역시 인류사에서 非一非再하다. 따라서 그러한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대체로 異端으로서 분별된다.
흔히 世俗의 종교조직에서도, 정통적 信條에 대해, 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자기 편으로서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異端視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옳고 그름의 대립이 있을 때, 정통파에서 쓰는 말로, 다른 종교나 종파를 가리키는 異敎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宣敎者의 경우, 자기의 宗旨를 옳다고 하고, 다른 종교나 분파를 異端邪宗이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예외적인 용법이다.
중국에서는 論語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말로, 정확하지 않은 학설이라는 뜻이다. 韓愈가 불교나 도교를 이단으로서 배격한 이후, 新儒敎(朱子學)에서는 ‘聖人의 道’에서 벗어난 학설이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陽明學 左派에 철저했던 李卓吾(李贄)는, 대표적인 이단으로 몰려 옥중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李卓吾(1527~1602)는 明나라의 사상가이다. 이탁오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하였다. 금욕주의와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禮敎를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反儒敎的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다.
이탁오는, 1527년 10월, 명나라 泉州府 晉江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 하였는데, 元나라 때 선조들은 해상무역, 통역관 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원장은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아버렸다. 명분은 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고,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중국은 세계적인 조류에서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의 길이 막히자, 李贄(李卓吾)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못하게 되었다. 이지의 초명은 林載贄였으나, 장성하여 종가의 姓을 따라 李贄라고 개명했다. 별호로는 宏甫, 卓吾子, 李和尙, 禿翁, 百泉居士 등이 있다.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지역을 전전하다,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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