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은 무엇인가
1. 形而上學(哲學), 形而下學(科學)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哲學思想史에서 가장 대표적인 形而上學的 對象은 모름지기 神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형이상학에서 일컫는 가장 근원적인 온갖 대상은, 결국 神의 다양한 변형일 따름이다.
형이상학이 분석하는 現實世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등, 有數한 철학자들의 철학사상을 거친 이후에도, 결국에는 神의 세계일뿐이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안, 그러한 神 자체를 解體하려는 거센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해체적 흐름은, 21세기에 이르도록 아무런 代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슬그머니 旣存의 온갖 神들이 復活을 圖謀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살아있는 神(메시아)들의 세상이 되어버린 北韓의 상황을 굳이 거론치 않더라도, 21세기의 지구별은 여전히 온갖 神(理念)들에 의해 迷惑된 迷信의 時代이다.
神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近代的 個人’의 自由는 실현될 수 없다. 현재로서는 ‘근대적 개인’ 역시, 神의 형이상학이 지어낸 연극놀음이나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이러한 虛無孟浪한 꿈에서 깨어나려면, 데카르트의 懷疑가 더욱 깊어져야 한다. 과거의 데카르트처럼, 다시 ‘神의 우물’ 속으로 沈潛해버리는 愚行을 재현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形而上學이라는 우물 속 개구리’ 신세로부터 벗어나, 우물 밖 세계를 明晳判明하게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形而上學的 神’을 프로파간다 삼아, 서민대중을 ‘개돼지 群衆’으로나 선동해대는 旣得權勢力의 造作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온갖 것을 무작정 해체하려는 解體主義勢力 역시, 고작 자기편의 利得을 목적하며, 새로운 형태의 惡魔性을 작동시키고 있을 따름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無産者革命으로써 평등한 세계를 실현시킨다던 共産主義勢力 역시, 어떻게든 좀 더 제 몫을 많이 챙기며 그것을 유지하려는, 資本主義的 畸形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直視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形而上學과 정합적인 神 槪念이, 전통적인 超越的 無限存在라는 신 개념보다도 그리스도교적이며, 福音書가 주장하는 신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고방식이, 오늘날 ‘過程神學’으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다. 결국, 가장 현대적인 형이상학자 ‘화이트헤드’ 역시도, 여전히 ‘形而上學的 神’의 영역으로 回歸한 것이다. 그러니 서양철학은 죄다 형이상학이며, 그 형이상학은 神學임을 알 수 있다.
‘形而上學(metaphysics)’은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形而上’이란 개념은, 형체가 없어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오직 直觀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超自然的이고 觀念的인 것을 의미한다.
흔히 영어의 ‘metaphysical’을 形而上으로 번역하는 데, 이 形而上이라는 말은, 周易 繫辭傳의, “형상 이전의 것을 ‘도’라 하고, 형상 이후의 것을 ‘기’라 한다(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에서 유래한 것이다.
여기서 形而上은 인간의 감각기관을 초월한 精神으로서 道를 가리키고, 形而下는 형상을 가진 物質 또는 그런 屬性 自體로서 器를 가리키는 말이다.
形而上은 사물이 형체를 갖기 이전의 근원적인 본모습이며, 形而下는 감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을 뜻한다.
宋代의 朱熹는, 形而上者는 形體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고 하며, 道를 理와 性이라고 해석하였고, 形而下者는 實相도 있고 모양도 있다고 하며, 器를 氣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과 사물이 생성될 때, 理를 먼저 받은 후에 本性을 갖게 되고, 氣를 받은 후에 形態를 갖추게 된다고 하였다. 이전에는 形而上인 理가 形而下인 氣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고 하였으나, 理氣의 관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理는 形而上的인 존재이고, 氣는 形而下的 존재로서,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兩者의 관계는 不離不雜에 있지만, 現象的 實在物에서는, 理를 따라서 氣가 있고, 氣를 떠나서 理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氣가 운동성을 갖는 데 반하여, 理는 無爲이고, 氣의 운동에 따르며, 거기에 질서를 부여할 뿐이다.
形而上學과 形而下學은, 理와 氣로 해석되며, 서로 不可分의 관계인 동시에, 통합될 수도 없는 관계로서, 동서양의 철학사상은 그 관계를 파악하는 이해방법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학설들의 전개와 발전이 이루어져 왔다.
대표적 形而上學인 哲學에 비하여, 대표적 形而下學인 科學은, 어떤 특수한 영역의 存在者를 구성하는 원리를 탐구한다. 예컨대, 經濟學은 經濟思想을 성립시키는 經濟法則을 연구하고, 物理學은 物理思想을 성립시키는 物理法則을 연구한다.
特殊性은 과학적 인식의 본질에 의거하는데, 과학은 어떤 특수한 視野, 즉 領域을 고정시킴으로써, 그 대상과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一切의 存在者(世界)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것이 바로 形而上學이다.
形而上學은 領域的·部分的인 지식이 아니라, 普遍的·全體的인 지식을 추구한다. 이것은 특수과학의 지식의 總和도 아니고, 특수과학의 지식을 성립시키는 ‘主觀的인 根據(認識論的 根據)’의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에 근거를 부여하는 궁극적 實在根據의 지식이다. 따라서 특수한 영역과 시야를 넘은, 超越의 視野에서 얻어지는 초월적 지식이다.
이 초월의 시야는, 인식하는 인간이 자기의 存在根據로 돌아가는 根源還歸의 길에서 얻어진다. 시간을 초월한 永遠도 거기서 알게 되며, 인간존재가 궁극적으로 뿌리내리는 根源도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形而上學을 학문으로서 최초로 확립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存在者에 관하여, 보편적으로 그 제1의 원리와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을 ‘제1철학(pr?t? philosophia)’이라 부르고, 그 학문체계를 最高位에 두었다.
그것은 일체의 궁극적 실재근거로서의 神의 지식이기도 하고, 그와 같이 고귀한 지식으로서 ‘智慧(sophia)’라고도 불렸다.
形而上學이라는 명칭은, 이 제1철학에 관한 책이, 1세기의 ‘안드로니코스’에 의한 全集 편찬에서, ‘自然學(physica)’에 관한 책 다음에 놓였으므로, ‘자연학 다음의 책(ta meta ta physica)’이라고 불린 데서 유래하였다.
周易 繫辭傳에서, 形而上의 道를 먼저 두고, 形而下의 器를 다음에 둔 것과 달리, ‘안드로니코스’는, 形而下의 自然을 먼저 두고, 形而上의 지혜를 다음에 둔 것이다.
그후 形而上學이라는 명칭은, 生成消滅하는 自然物에 근거를 부여하는, 永遠不滅의 원리를 구하는 학문의 내용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변화하는 자연물 배후에, 그 존재근거로서 영원불멸의 實在를 구하려는 것은, 그리스철학에서 본질적인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철학은 周易哲學과 마찬가지로 形而上學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全世界의 창조자로서 영원한 신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에서도 적합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의 형이상학은, 중세 그리스도교 신학 체계에도 대표적으로 受容되어, 거기서 한층 심화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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