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어떻게 신학이 되는가?』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26년 1학기 〈기독교인문학〉 세미나에서 시작된 질문으로부터 태어난 책이다. 이 책은 미술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거나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림 앞에서 인간을 묻고, 인간의 자리에서 신학을 다시 묻는다. 회화는 여기서 신앙의 장식물이 아니라, 인간 실존과 세계의 고통, 죄와 은총, 노동과 일상, 창조세계와 죽음 너머의 희망을 읽어내는 신학적 사유의 자리이다.
이 책의 중심 질문은 분명하다. 회화는 어떻게 신학이 되는가? 회화는 눈에 보이는 색채와 형상으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그러나 좋은 그림은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를 가리킨다. 한 인물의 얼굴, 어두운 방 안으로 스며드는 빛, 고개 숙인 노동자의 몸, 황량한 들판, 폭력의 장면, 밤하늘의 별빛, 십자가와 무덤의 풍경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누구인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어디에서 무너지고,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묻는다. 이 책은 바로 그 물음의 자리에서 신학을 시작한다.
책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인간 실존과 은총의 빛”은 불안과 결핍, 시선과 관계, 익명성과 소명의 문제를 다룬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인간의 불안과 상처가 어떻게 은총의 빛 안에서 회복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밀레, 고흐, 렘브란트의 작품은 결핍과 귀환, 용서와 회복이라는 성경적 서사를 회화적으로 읽게 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는 타인의 시선과 폭력, 신뢰와 회복의 문제를 묻고, 자코메티, 김환기, 카라바조를 함께 읽는 글은 익명의 시선에 포획된 현대인이 어떻게 소명의 시선 안에서 다시 인간이 되는지를 탐구한다.
제2부 “죄와 악, 폭력의 이미지”는 인간과 세계 안에 자리한 어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고야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난다〉, 〈1808년 5월 3일〉, 〈사투르누스가 아들을 삼키다〉는 이성의 붕괴, 권력의 폭력, 인간 안의 괴물성을 드러낸다. 데미안 허스트를 다룬 글은 현대 사회가 죽음을 어떻게 전시하고 소비하는지를 묻고, 죽음을 삶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신학적 성찰로 나아간다. 렘브란트의 성경화는 죄의 폭로와 심판, 그리고 은혜의 빛을 함께 보여준다. 〈어리석은 부자〉, 〈벨사살의 잔치〉, 〈간음한 여인〉에서 빛은 단순한 명암 효과가 아니라, 인간을 드러내고 심판하며 다시 살리는 구속사의 언어가 된다.
제3부 “민중, 노동, 일상의 신학”은 신학의 자리를 낮고 평범한 삶의 현장으로 옮긴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은 땅과 노동, 가난과 축복을 신학적으로 읽게 한다. 여기서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땅과 맺는 관계이며 창조세계 안에서 은총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박수근의 그림을 읽는 글은 빨래터, 나무 아래의 여인들, 절구질하는 여인의 일상 속에서 주변부의 삶과 구원의 시간을 발견한다. 화려하지 않은 일상, 이름 없는 사람들, 반복되는 노동의 몸짓이야말로 기독교 인문학이 주목해야 할 신학의 자리임을 보여준다.
제4부 “창조세계, 땅, 거주의 신학”은 인간과 자연, 도시와 기계문명, 땅과 거주의 문제로 시선을 확장한다. 윤형근의 회화는 하늘과 땅, 분리와 관계, 비움과 거주의 질서를 묻는다. 그의 색면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창조세계의 질서와 인간의 자리를 사유하게 하는 침묵의 장이 된다. 이정재의 독도 회화는 섬과 바다, 바위와 생명을 통해 창조세계의 보존과 부활의 상상력을 불러낸다. 페르낭 레제의 도시와 기계 이미지는 기계 문명 속에서도 성육신의 가능성을 묻는다. 하나님은 자연 안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와 노동, 기계와 현대 문명의 한복판에서도 인간을 만나시는가. 이 질문은 오늘의 신학이 피할 수 없는 물음이다.
제5부 “초월, 계시, 죽음 너머의 희망”은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는 신앙의 시선을 다룬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성모 이미지는 마리아의 품 안에서 성육신과 구원의 신비를 바라보게 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산 위의 십자가〉, 〈바닷가의 수도사〉, 〈참나무 숲의 수도원〉은 자연 속에서 계시와 침묵, 죽음과 희망의 문제를 묻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들은 르네상스 인간 이해를 통해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인간은 창조세계 안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동시에 그 존귀함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책임과 겸손을 요구하는가.
이 책에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처럼 두 번 다루어지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같은 그림이라도 어떤 질문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학적 사유가 열린다. 어떤 글에서는 불안과 상처가 은총 안에서 회복되는 실존적 이미지로 읽히고, 다른 글에서는 결핍과 귀환, 용서와 회복이라는 성경적 서사의 시각화로 읽힌다. 하나의 그림이 여러 신학적 독법을 낳는다는 사실은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학술논문집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각주와 방대한 참고문헌보다, 그림 앞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흐름을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가벼운 비평문도 아니다. 저자들은 각자의 작품을 붙들고 인간 실존, 죄와 악, 노동, 창조세계, 죽음, 희망의 문제를 치열하게 물었다. 그래서 이 책은 대학원 세미나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신학과 예술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다.
기독교 인문학은 신앙을 좁은 교리의 언어 안에 가두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철학, 예술, 영화, 회화와 만나며 인간의 삶을 다시 읽는 작업이다. 『회화는 어떻게 신학이 되는가?』는 그 가능성을 회화의 자리에서 보여준다. 그림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 바라보면 말을 건다. 그 말은 때로 인간의 불안을 드러내고, 때로 죄와 폭력의 어둠을 폭로하며, 때로 가난한 일상 속에 깃든 은총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신학은 그 그림 앞에서 다시 묻기 시작한다. 인간은 누구인가. 세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어디에서 우리를 만나시는가?
이 책은 그 질문 앞에 선 저자들의 공동 응답이다. 그림 앞에서 신학을 묻고, 신학으로 삶을 다시 읽으려는 이 작은 시도가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사유의 문을 열어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