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문의 부조리한 유전자 상속을 거부한 폴은 과연 삶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장폴 뒤부아의 소설은 언제나 생활주변을 주목하고, 가까이에서 마주치는 사람, 즉 가족이 자주 주요 등장인물이 된다. 그러나 그가 그려내고 있는 가족구성원들을 연결시키는 끈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기보다는 늘 느슨하게 풀려 있다. 부모 자식 간의 문제, 부부 간의 문제, 친구 간의 문제, 연인 간의 문제는 그의 소설에서 흔히 다루는 소재들이다. 이 시대 사람들의 고독은 그런 인간관계들이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실제로는 서로 깊이 교감하고 연대를 이룰 바탕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좌절감에서 비롯된다.
폴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전문의 과정을 이수한 의사이지만 바스크 지방 전통 스포츠인 펠로타를 할 때만이 무한한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틈만 나면 펠로타를 연습하고 시합에도 참가했다. 펠로타 스카우터로부터 마이애미 프로리그에서 선수로 뛰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폴은 툴루즈의 집을 떠나 마이애미로 간다. 이 소설에서 마이애미 부분은 부활의 이야기이자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폴은 마이애미 펠로타 팀의 프로선수가 된다. 그는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지만 펠로타 경기를 즐기고,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 직전에 구해낸 개 왓슨과 한집에 살면서 동료이자 친구인 에피파니오와도 깊이 교감하며 생의 기쁨이 무엇인지 익혀간다. 노르웨이 출신인 연상의 여인 잉빌 룬데와의 사랑은 타인으로부터 심지어 자기를 낳아준 부모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 폴에게는 삶에서 경험한 최고의 선물이다. 폴은 이런 것들이 옆에 있는 한 무너지지 않고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며 자신을 격려한다. 그러나 환희의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프랑스영사관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이 그를 다시 툴루즈로 부른다. 아버지가 아래턱을 스카치테이프로 동여매고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다. 이제 지상에 남은 가족은 없다.
폴은 해답을 얻지 못한 질문을 떠안은 채 툴루즈로 돌아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한다. 툴루즈로 돌아온 폴은 아버지의 진료실 서랍에서 찾아낸 검은 수첩 두 개에서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비밀수첩을 본 폴은 그동안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닫게 된다. 그가 재발견한 아버지는 이제 그에게 짐 하나를 지운다.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유산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장폴 뒤부아는 이 소설에서 현재와 과거의 기억 사이에 끼여 팽팽하게 당겨진 폴의 심리상태를 정교하게 보여준다. 펠로타 선수인 폴은 모든 문장에 자리 잡고 뛰어올라 회전하고 강약을 조절하고 방향을 바꾸어 공을 날려 보낸다. 삶은 어떤 의미에서 펠로타 경기와 같다. 라켓에 넣어 던진 공이 높은 장벽에 가로막힐 수도 있지만, 출구, 즉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이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다. 장폴 뒤부아가 《상속》을 통해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상속》에는 허공으로의 추락이 있지만 또한 펠로타 경기에서처럼 도약이 있다. 사실 추락은 도약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작가는 삶이 절망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도약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불행을 이야기하면서 그 심층에서는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 독자는 이 작품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는 삶을 읽으며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런 삶조차 긍정할 분명한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가능성을 느끼기만 해도 우리는 위안을 얻는다. 슬픔과 상실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한쪽에 이미 위로를 마련해놓았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상속》에는 장폴 뒤부아가 즐겨 다뤄왔던 삶의 문제들이 녹아있고, 아픔을 동반한 노스탤지어가 있다. 부조리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발휘되는 특유의 유머감각과 유려한 문장, 신랄한 비유, 반짝이는 재치가 있다. 장폴 뒤부아는 또다시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소설은 말한다.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삶이란 펠로타 경기에서 공을 라켓에 넣어 던질 때처럼 ‘상대의 위치를 고려하고, 강약을 조절하고, 벽면의 강도와 높이를 가늠해 섬세하게 방향을 바꿔 공을 날려 보내야 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