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지혜는 늘 불완전하고 파편화되어 있다
공부하면서 얻는 지도 역시 찢겨 있고 나침반은 부실하다
그러나 남다른 생활양식으로 길을 내고
자득으로 방향을 얻어 자기 구제의 공부길에 나서는 일
그것은 앞선 자의 책임이며 뒤따르는 자의 운명이다
말하면서 공부한다
박문호, 유시민, 정희진의 경우
글쓰기, 말하기, 읽기, 듣기로 끊임없이 인문학의 자리를 마련해온 저자는 『조각난 지혜로 세상을 마주하다』에서 총 열 차례 강의를 한다. 첫 강의부터 시선을 붙잡는다. 말로 우리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박문호, 유시민, 정희진을 다루기 때문이다. 세 사람에 대해 저자가 내놓는 질문은 이렇다. ① 정희진은 왜 저렇게 조리 없이, 늘 샛길로 빠지면서 말할까? ② 박문호는 왜 인문학을 물로 볼까? ③ 유시민은 왜 인문학자연然하는 걸까?
정희진의 강의를 들어본 이들은 알 텐데, 그는 갑자기 맥락을 떠나 샛길로 달리며 만담식으로 말한다. 가지런한 이론을 내놓기보다 온몸으로 이론과 주장을 펼치는 듯한 모습은 마치 연극배우 같다. 기억의 천재 박문호는 ‘이해하지 말고 암기하라’ ‘질문하지 마라’면서 인문학적 논변을 실없는 짓으로 여기는 듯하다. 특히 초성 리을 발음이나 이중모음이 안 되는 그의 경북 산골 발음에서 우주를 섭렵한 듯한 박식이 뿜어나올 때 청중은 그 대조성에 놀란다. 유시민은 좋은 기억력과 열린 태도로 빠른 학습자의 면모를 보인다. 비축해둔 비평 거리가 많아 남의 말에 곧잘 끼어드는 그는 그러나 풍운아적 기질로 남다른 식견을 드러낸다. 다만 경제학 전공에 정치인의 이력을 보유한 그의 자리는 인문학에 있지 않았는데 왜 지금에 와서 인문학자연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셋의 말하기와 글쓰기, 시간에 따른 변화를 쫓으면서 인문학적 관심이 어떻게 넓어지고 재배치되며 진화하는지를 살핀다. ‘수행적-표현주의적’으로 보이는 정희진의 발화법, ‘한물간’ 사회과학 영역에서 벗어나 변신을 꾀하려는 유시민, 엄밀한 교과서주의적 자연과학자이면서도 공동체적 전망을 내비치는 듯한 박문호의 경로에서 우리는 인문학이 각자의 삶에서 자리잡는 방식을 볼 수 있다.
1강의 말하기는 9강에서 강조하는 ‘응해서 말하기’와 함께 읽어도 통하는 면이 있다. 9강에서는 듣기-말하기의 관계, 말하기-글쓰기의 관계를 고찰한다. “귀를 가졌다고 듣는 게 아니라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어떤 훈련을 거쳐야만 들린다.” 또한 말하기는 글 쓰듯이 하면 안 된다. 말은 듣는 이와 정신적 관계를 맺는 일이므로 그를 위해서, 그를 향해서 이뤄져야 한다. 말은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또 상대의 동의를 이끌어내도록 해야 하므로 실용성이 필수다. 그러니 발화하는 자는 자신의 기량을 높여야 한다. 말하기는 에고를 늘어놓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저잣거리에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 속으로 자기 몸을 밀어넣는 행위다.
자기를 구제하는 공부
전체가 아닌 오로지 부분만 안다
인문학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 전체를 구원하겠다고 말하는 종교가 ‘공부’, 혹은 인문학과 어긋난다고 본다. 종교가 부리는 과욕은 안이하고 때론 무지하다. 종교를 따르는 대중은 쏠려서 믿고, 맡겨서 믿고, 밑져야 본전이니 믿는다.
반면 인문학을 공부해 얻는 지식과 경험은 파편들의 모음이다. 부분만 아는 사람은 아는 척하지 못한다. 거기서 얻는 것은 고작 조각난 식견인데도 제 몸으로 얻어내야 하니 공부의 대가는 비싸다.
저자가 말하는 공부는 삶과 한 몸이다. 서언에서 강조하듯 자기 앞가림을 못 하는 지식, 이웃의 아픔에 힘을 못 쓰는 고담준론, 평생 붙들고 있어도 자기 존재를 증명 못 하는 공부는 모두 “목구멍에 들러붙은 독버섯”이나 다름없다.
종교는 자신들의 설명을 ‘체계화, 전체화’한다는 점에서 경계의 눈초리를 받아 마땅하다. 마치 우주 전체를 아는 것처럼 욕심 부리는 종교 담론들은 현대인의 상식으로부터 한없이 후퇴한다. 인문학적 공부의 출발점이 ‘모른다-모른다-모른다’라면, 종교는 한결같이 ‘안다-안다-안다’고 주장하는 데서 이미 그 어리석음과 오연함이 드러난다. 이런 종교가 내놓는 지침은 ‘체계적’이므로 거기에 젖어든 대중의 인식 역시 ‘체계적’으로 막히고 굴절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오히려 유교의 의례儀禮를 주목해서 실천적 지혜를 얻고자 한다. 늘 과도한 설명을 하는 종교들과 달리 유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점치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차라리 의례에 근거한 삶의 방식을 굳건히 한다면 현실적인 구제에 다가”설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저자가 전작들에서 강조한 연극적 수행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 인간이 얻는 조각난 앎은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따라 삶을 훨씬 낫게 만들고, 자기 구제의 걸음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앎은 어렵게 뚫고 들어가 그 중심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공부하며 걷는 길은 조각나 있기에 구제의 실천 역시 부분적이다. 그 길에서 나침반은 잘 들지 않고 지도도 찢겨 있지만, 사람들 소문에 흔들리지 말고 조각난 빛이 새어나오는 곳에서 조심조심 걷도록 한다. 비록 ‘모른다’는 게 우리가 가진 휑한 조건이지만, 정신은 계속 자라나므로 언젠가 깨침이 스며들 수 있다.
“정신은 서사적 움직임이며 이는 의미 생성을 지향한다.” 현대 도시민들의 가장 큰 관심은 삶의 의미이지 구원이 아니다. 종교를 잃은 그들은 문화생활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거기서 의미를 캐내려 한다. 하지만 의미가 손에 잡힐까? 그렇다고 답이 문화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여기서 공부길을 제시하는데, “마음이 자라고 바뀌는 데”서 삶의 요령이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낳은 종교, 사상, 과학 중에서 최상의 앎의 조각들을 가려 배치하면 그 지도에 몸을 맡긴 채 다른 삶의 양식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글 쓰면서 공부한다
공부는 무엇보다 ‘글’이다. 저자는 글 쓰면서 공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왔다. 인간은 표현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며 밝음으로 나가는데, 표현이란 정신이 무엇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결국 글과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 문장은 각자 마음의 결과 체를 보여준다.
글은 인간이 만든 도구 가운데 가장 정교해 거의 정신의 원점까지 밀고 나간다. 형체가 없는 마음은 도구와 매체에 의해 조형, 변형된다. 그러니 글이 아름답고 풍성해지면 그 사람의 마음 역시 아름다움과 풍성함에 가까워진다. 특히 정신 속에서 개념과 글의 길을 내면 그 길들은 서로 이어진다. 반대로 걷지 않으면 그 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저자는 글이 사실에 근거해 정확한 기억을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의 첫 강의에서 박문호와 유시민의 뛰어난 기억력, 정희진의 강한 정서로 점철된 기억을 살펴봤듯이 공부와 글쓰기에서 기억력은 빼놓을 수 없다.
정신의 길들을 걷기 좋게 정비하고, 곳곳에 개념들의 표지석을 세우며, 각각의 길이 이어져 통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정신과 마음을 다루고 키우는 가장 기초적이고도 표준적인 방식이다. 언어성과 인간성의 관계를 탐색하는 게 인문학의 기본이 되듯, 글쓰기와 공부하기의 관계도 인문학의 열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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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7강은 노무현·노회찬·박원순의 자살을 지역성과 계급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비극적 사건의 강도만큼이나 저자의 관점도 날카롭다. 이 책은 말·글·공부를 큰 줄기로 삼는 가운데 사랑·일본·여자 등의 주제로 이어나간다. 공부는 그 근본에서 이미 ‘공부론’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자의 삶 그 전체의 형식은 이미 변화를 예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