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의 연애 연대기를 녹여낸 관계의 기술 50가지
연습과 오해와 배움과 상처의 만남들
사랑의 전말과 그 기록
“글쓰기와 사랑은 돈이 필요 없는 영구적인 에너지다.”
평생을 사랑하고 글을 써온 타이완 작가 천쉐는 사랑과 글쓰기에 똑같은 비중을 둔다. 그는 사랑하면서 언제나 작가가 될 자양분을 얻었고,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사랑하는 두 사람이 뒤엉켜 꽃으로 피어난다. 천쉐가 쓴 글쓰기에 대한 지침서가 『오직 쓰기 위하여』라면, 나란히 쌍둥이처럼 자라난 책이 『사랑을 시작하는 우리에게』다. 이 책에서는 독자들에게 사랑의 기술과 관련된 50가지 연습문제를 제시한다.
이 책은 천쉐가 사랑을 시작한 때부터 짜오찬런과 재회할 무렵까지 20년간의 사랑을 다룬다. 천쉐는 동성 연인 짜오찬런과 결혼했다. 어떤 독자들은 두 사람의 동거 일기인 『같이 산 지 십 년』을 통해 둘의 소소한 일상을 접했겠지만, 둘은 사실 재결합한 것이고, 오랜 세월 이별해 있으면서 각자 다른 사람을 사귀었기에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
천쉐는 사랑을 쉬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건 그녀가 매력적이라거나 연애 기술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아주 커다란 결핍과 폐허 같은 불안이 있어 옆에 누가 없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천쉐의 실존적 상황이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낮은 자존감으로 생존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따뜻하게 접근해오는 것을 밀쳐내지 않았다. 그중 어떤 관계는 연습이었고, 오해의 뿌리였으며, 상처이자 배움의 경로였다. 그럼에도 사랑은 언제나 각각의 고유성을 갖고, 매번 실패하면서도 되풀이하고 싶게 만든다. 이 책은 100퍼센트 경험에서 나온 사랑의 기록이자 기술이다.
사람들은 사랑이 감정이므로 충동과 즉흥성일 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떤 대상이 내 안으로 들어와 합치되는 것이므로 마치 운명 같다. 하지만 사랑은 시간을 삼키면서 자라나는 속성을 지녔다. 두 사람은 시간의 좌표 위에서 시행착오와 노력과 기술로 사랑을 이루어나간다. 천쉐는 이걸 연습이나 방법론으로도 보자고 제안한다.
·사랑은 가장 엄격한 자아 인식이다
“고요한 밤, 당신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픈 마음을 꾹 참는다. 그 대신 어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일기를 쓴다.” 사랑이 시작됐다면 상대한테 문자 보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기록하는 것이 낫다. 관계는 줄타기다. 상대는 내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이긴 하나, 그건 종종 안전하지 못하다.
천쉐가 이 책 전체에 걸쳐 강조하는 핵심은 “사랑은 나 자신을 비추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가장 엄격한 자아 인식 과정이다. 나는 상대를 배려하고 뭐든 맞춰주는가? 하지만 배려는 때로 ‘상대를 잃을까봐 두렵다’거나 ‘상대가 내 본모습을 좋아하지 않을까 두렵다’의 다른 말이다.
연애를 시작하면 상대의 기분을 살피느라 자신의 욕구는 밀쳐놨던 천쉐는 연인이 조금만 언짢아 보여도 자기 비하를 했다. 그런 세월을 지나오며 내린 결론은 “맞춰주지 말자”이다. 상대에게 조심하고 염려하는 태도는 비위를 맞추는 데 있지 않다. 그건 오히려 나에게서 그를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첫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다
사랑의 핵심은 첫 느낌으로 지탱된다. 첫 느낌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여느 인간관계와 다르지 않다. 기술은 배우면 되고, 관계는 적응하면 된다. 하지만 설렘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인연을 만나기 쉽지 않으니 상대와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 해도 아직 설렘이 남아 있다면 둘이서 함께 닳아버린 부분에 광을 내보자고 제안한다.
·상처 있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연애 상대다
불안은 연애를 하도록 만든다. 공허가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그걸 메워줄 상대를 찾는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이 가장 위험한 연애 상대이며, 구멍이 많거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은 타인이 구제해줄 수 없다. 연인은 결코 나를 치료해주는 사람이 아니다.
천쉐의 마음에는 늘 커다란 구멍이 있었다. 그래서 연애를 갈망했는데, 막상 상대가 나에게 애정을 쏟으면 숨이 막힐 것 같아 도망쳤다. 관계는 언제나 서로의 심장이 빗나가는 방식으로 이뤄졌고, 천쉐의 자기혐오는 점점 더 심해졌다. 그렇게 마흔두 살까지 한 번도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내가 불안할 때 오히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거기에 기대는 일은 거부해야 한다. 천쉐는 몸과 마음이 약할 때는 혼자 음식을 만들고, 마약을 끊듯 애인에 대한 의존을 끊었다. 보살펴주겠다는 제안을 받으면 거절했다. 독립적인 인격이 없으면 그 사랑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잘 사는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
혼자 사는 법을 배웠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데 굳이 연애를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헌신’이라는 행위를 위해 사랑할 것을 권한다. 즉 사랑은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헌신은 나를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뒤바꾼다. 또한 우리가 쏟아부은 헌신은 잠자고 일어나보면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있다.
헌신은 배려와 다르다. 천쉐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은 배려가 절대권력으로 변하는 상황이다. 즉 “난 널 이렇게 배려하는데 넌 왜 날 배려 안 해”라며 감정의 저울질로 변하는 순간 그것은 사랑의 붕괴를 알리는 첫 번째 징후가 된다.
·일상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
일상을 함께하는 것이 사랑이다. 물론 동거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천쉐는 동거가 ‘장기 이식’ 같다고 말한다. 먼저 적합한 상대를 찾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거부 반응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시절, 천쉐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월세도 절약할 겸 대부분의 파트너와 동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데이트 폭력과 집착 등 불행의 싹은 어김없이 싹텄다. 천쉐가 지방에 장사하러 가거나 혹은 강연과 북토크를 하러 가면 애인은 불안해했고, 그래서 둘은 불행해졌다.
그럼에도 ‘함께하기’는 대체할 수 없는 연애 방식이다. 이건 두 사람이 서로에게 활짝 열어 보이며 상대방의 세계에 녹아든다는 뜻이다. 함께하면 상대를 들여다보는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게 된다. 나의 좁은 성정과 모자란 부분이 더 잘 드러난다. 따라서 함께하기는 느리고 섬세해야 한다. 이건 육체적 사랑보다 더 많은 ‘접촉’을 원한다는 뜻이다. 즉 상대방의 삶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더 넓고 더 깊은 연애다.
·이해의 적은 상처받은 상상력
이 책은 사랑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천쉐는 ‘이해’에 대해 색다르게 정의 내린다. “‘이해’는 남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한편 이해의 적敵은 ‘상처받은 상상력’이다. 상처받은 자는 머릿속에서 오해를 키우면서 추리를 하고, 엉뚱한 내면극을 벌인다. 다시 말해 상상력과 배려는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연애관계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기대 역시 마찬가지다. 기대는 “원망과 비난의 뿌리이자 싹이며, 사랑과 결혼의 암살자”다.
연애할 때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것은 ‘안전하지 않음’을 선택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즉 당신 마음에 들지 않거나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상대방의 어떤 점들을 포용해야 하고, 당신 자신의 안전감은 포기해야 한다. 특히 연인은 ‘통제’받는 대상이 아니므로, 나 자신의 안전한 느낌을 포기한 채 상대를 최대한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
·함부로 대해지는 사람, 상처받지 않는 사람
함부로 대해지는 사람과 상처받지 않는 사람(강자)은 어쩌면 동의어일 수 있다. 천쉐는 연애할 때 두 입장에 다 놓였는데, 그 둘은 겉모습은 달라도 결국 똑같은 자기방어임을 알게 됐다. 천쉐는 젊은 시절 추앙, 인정, 욕구와 사랑의 차이를 구별 못 한 채 ‘강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그가 생각한 강자는 운동을 잘하고, 예술적 소질이 있고,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사랑에 눈멀면 그 강자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 보니 그들은 ‘나’를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끝내 양쪽 다 상처를 입었지만 교훈은 비틀린 채 심어졌다. 즉 천쉐 자신이 강자가 되어 남을 차거나 버리는 일이 반복된 것이다.
상대에게 마음을 주는 이유는 보호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온전히 내주어야만 타인의 삶을 진실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장받을 수 없고, 기대할 수 없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고,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이 거듭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강인해지는 법을 차츰 배워간다.
·사랑을 끝내는 올바른 방법
이별 역시 사랑의 한 과정인데 사람들은 이에 대해 조언을 잘 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 이별을 겪었던 천쉐는 “사랑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사랑”이라는 말로 끊기의 기술에 대해 말한다. 한번은 애인이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분노가 치밀고 빠져나갈 출구가 없었다. 이 책은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잠수 타기’를 권한다.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직접적으로 반응해도 좋다. “머릿속에서 폭발하게끔 허락하자. 자기방어, 교양, 이성, 온유함 따위는 모두 다 산산이 부숴 흩어버리자.” 그러고 나면 그 사랑은 서서히 시들어 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