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생애가 필요하다
철학자의 동료가 되기 위해서도
하나의 생애가 필요하다”
철학자를 이해하려면 하나의 생애가 필요하다
페르디낭 알키에는 데카르트, 칸트, 스피노자 연구자이자 들뢰즈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처음 소개되는 그의 첫 책인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는 1950년대 중반에 한 강연이다. 전후 과학기술의 발전은 나날이 거듭되었던 반면, 철학은 ‘발전’의 경로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학은 개별 철학자가 각자 수행하는 것이며, 그 철학자의 생애 전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왜 철학사나 철학의 체계가 아닌 철학자 개개인을 들여다봐야 하는지 책 전체에 걸쳐 설명한다.
가령 유클리드 기하학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굳이 유클리드를 알 필요가 없다. 반면 데카르트나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데카르트와 칸트를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데카르트, 칸트는 생전에 자신들이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접근이 아니다. “하나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그 저자의 심리를 초과”하며, 사유란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데카르트의 정서적인 체험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의 철학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심리적 해명은 철학적 진리를 다른 것들에 의해 규정된 단순한 사실로 변환시킴으로써 철학적 진리다운 것을 부정하게 되며, 결국 설명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그 인물을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철학함이 인격성과 연결됨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고 그 인격성은 ‘보편적’ 인격성이라 할 수 있다. 즉 철학과 철학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데, “철학은 행보”로서, 하나의 인격이 그 행보를 실현함으로써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의 행보는 언제나 철학자 개개인에 의해 다시 수행되므로 그들은 체계로 거론될 수 없다(체계에 묶이는 순간 그들 각각이 모색하려던 진리는 옆으로 치워지며, 대상화된다. 대상화는 격하, 심지어 추락이다).
저자는 철학자들이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 이해받길 원했는지, 혹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받지 못해 불만족했는지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이때 한편에는 철학자의 고독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그 철학자가 언술하는 진리의 보편적 성격이 있다.
다시 말해 철학을 이해하려면 철학자를 이해해야 한다. 물론 철학자가 태어날 때부터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철학적이지 않은 앎 전체에 대한 반작용을 통해서, 즉 우리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일차적 앎을 넘어서려는 열망에서 철학을 시작한다. 저자는 우리가 세심하게 각 철학자의 역사를 따라가는 한에서, 모색되고 있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철학적 진리는 비인격적이지 않은데도 보편적이다. 다시 말해 주관적 보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철학의 행보는 정신 자체의 행보다
철학자는 대개 잘 이해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고독은 시인의 고독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철학자는 스스로를 보편적 진리의 담지자로 여기지만, 너무나 자명해 보이는 이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공유시킬 수 없다는 데서 겪는 고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편성의 고독”이다. 다시 데카르트를 예로 들자면 그는 1630년 4월 그 유명한 영원진리창조론을 막 정리한 뒤, 이것을 아는 건 “권리상 보편적”이더라도 모두에게 오인되지 않고 설득할 자신은 없다고 말한다. 알키에는 이 현상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철학자의 놀라움은 서구 철학의 원천 그 자체다.” 소크라테스가 이해받지 못한 채 사형을 선고받은 데서 플라톤의 철학이 태어난 것처럼, 아주 자명한데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걸 철학자들은 목격한다.
세상에는 서로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여럿 있다. 저자는 이를 ‘비극’이라고 보는데, 한편에는 철학자들을 이해하길 원하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역사와 행정을 이해하되 철학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후자가 다수다.
그런데 문제는 지식인들이 역사와 철학을 한꺼번에 이해하길 원한다는 점이다. 저자에 따르면 둘을 동시에 이해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데, 이런 욕구를 가진 이들은 대개 역사를 통해 철학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철학자는 역사 안에 위치지어지고, 이것은 철학자를 이해하지 않는 결과로 이어진다. 바로 헤겔이 철학을 역사 안에 놓으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다른 철학자들보다 우위에 놓았다. 이것의 문제는 각각의 철학자가 자기 시대를 표현하고 있을 뿐 최종 준거는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철학하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존 철학자들이 수행했던 것과 유사한 행보를 통해서 철학자들을 닮는 것이다(다시 강조하건대 ‘행보’는 체계에 맞설 만한 힘을 갖고 있다). 그들의 보편적 고독을 진리의 고독으로 느끼면서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명의 철학자가 되지 않고서는, 역사를 횡단해서 그리고 역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철학자들의 동료로 만들지 않고서는, 철학 전체의 영원성인 이 영원성을 되찾지 않고서는 철학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은 이를테면 시나 음악과 다르다. 그 이유는 철학은 진리를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철학을 이해하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자의 작품이 표현하려는 진리가 어떤 장르의 것인지 아는 일이다.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이렇다. “한 명의 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어떻게 철학자가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