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언젠가 반드시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책!
* 영웅을 필요로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리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를 다룬 걸작 평전
* ‘황제의 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라 불리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이 시대 최고의 역사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들려주는 ‘중세의 진수’, 그 두 번째!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그리고 교권과 왕권을 둘러싼 대결로 보는
시오노 나나미의 마지막 중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잡지에 첫 작품을 연재할 때부터 “언젠가 이 사람에 대해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다룬 걸작 역사 평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가 한국 독자들을 찾아온다.
총 2권(상, 하)으로 구성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는 시오노 나나미가 쓰는 중세를 다룬 마지막 작품으로, 교권과 왕권을 둘러싼 그리스도교 세계 내부의 대립을 다루고 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의 대결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중세를 다룬 작품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중세라는 시대를 살며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지를 되찾았으며, 유럽 최초의 국립대학을 만들었던 ‘황제의 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황제 프리드리히 2세. 파란만장했던 ‘화려한 반역아’이자 ‘압도적 선구자’의 생애를 시오노 나나미의 박진감 넘치는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에서는 술탄과의 교섭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적’이라 지목당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와 그의 사후 유럽 세계 모습을 그린다.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가열되는 와중, 결국 교황은 프리드리히의 황제 지위를 박탈하겠다고 선언한다.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멜피 헌장’을 제정한 그는 이외에도 법에 근거한 중앙집권국가 설립을 위한 많은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정치와 외교만이 그의 관심사인 건 아니었다. 인종에 관계없이 여러 학자를 벗으로 삼고 스스로도 과학적인 책을 집필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인간과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력으로 바라본, 영웅을 필요로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꼭 읽어봐야 할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이야기, 그 두 번째 권이다.
<책 속에서>
‘무인’과 ‘정치가’의 차이는 뛰어난 무장과 뛰어난 통치자의 차이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예로 들면, 독주자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차이 아닐까.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생애를 통해 교향악 지휘자였다. 그의 행동을 좇고 있자면 참 잘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동시에 하고 동시에 대처했구나 싶다. 연구자라면 그런 점들을 자세히 서술하는 게 의무일 테지만 그러면 역사 서술에 꼭 필요한 흐름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과감히 잘라내듯 생략하며 쓰고 있는데 같은 시대의 다른 황제와 왕들도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스타일이었냐 하면 전혀 아니다. 평생 교향악 지휘자로 살았던 프리드리히가 중세 후기라는 시대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지휘자 같은 프리드리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라는 시대를 비추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레시아에서 철수한 다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어떻게 실행에 옮겼는지 열거해보겠다.
(…)
생각해보면 중세 후기의 거인이자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성 프란체스코와 황제 프리드리히는 로마 교황이 생각하는 만큼 이질적인 존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시종일관 주장한 것은 예수 시절의 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황제 프리드리히가 계속 주장한 것은 예수가 말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또 제5차 십자군에 동행한 프란체스코는 알 카밀에게 가서,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평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프리드리히도 제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오리엔트로 향하는데 역시 알 카밀과의 사이에서 강화, 즉 평화 수립에 성공한 것이다. 나이가 열두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게다가 나란히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어디선가 만난 적은 없을까, 연구자들은 필사적으로 찾았으나 아직도 그것을 실증할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만났더라면 수도사와 황제라는 위치를 넘어서 함께 공감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교황 그레고리우스보다도 더 서로 공감하지 않았을까.
_본문 41쪽-48쪽
15일이나 휴회한다고 하니 공의회 참석자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리옹을 비우고 있었다. 영국 왕의 대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왕과 협의해야겠다며 본국으로 건너가 협의를 끝내긴 했으나 아직 도버 해협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타데오는 리옹에 머물면서 동료 피에르 델라 비냐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7월 17일에 갑자기 소집된 공의회의 참석자는 원래 모였던 150명에서 대거 줄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교황은 강행한다.
출석한 사람만 모인 자리에서 교황은 재판관의 판결을 읽어내려갔다. 공소권을 인정하지 않은 교회법에 근거하는 이상 그것이 최종 판결이 된다.
재판장이기도 한 인노켄티우스 4세는 검사 역을 맡은 세 명의 스페인인 주교가 주장한 황제의 죄상을 다 인정했다. 그에 대한 타데오의 반론은 모두 기각했다. 이날 교황의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그가 차지한 높은 지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다. 그런 그가 한 모든 짓은 이단 행위이고 그 자신이 속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하고 있다. 이제까지 그에게 내렸던 파문도 이 ‘교회의 적’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더욱더 엄격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교황은 계속했다.
나는 독일의 선제후들을 비롯한 제후 전원에게 진언한다. 프리드리히를 대신할 황제 선출을 서두르라고.
다만 시칠리아 왕국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은 이 왕령의 진정한 소유자인 로마 교황에 권리가 있는 이상 왕국의 왕이 될 자는 내가 생각하겠다.
이 판결을 들은 타데오 다 세사는 손도 안 들고 일어나 넓은 대성당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디에스 이스타 디에스 이라에, 칼라미타티스 에 미제리아에(Dies ista dies irae, calamitatis et miseriae)!”
“오늘 이 순간 신이 분노의 불길을 일으켜, 인간이 고통받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주군과 항상 같은 생각을 해온 타데오 다 세사였다. 그런 그가 내뱉은 라틴어의 의미를 생각하면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라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반하는 행동에 나선 교황 인노켄티우스에 신이 분노해, 이로 인해 결정적인 일이 된 황제와 교황의 항쟁으로 관련 없는 사람까지 고통을 받는 시대가 온다고. 초원에서 거대한 코끼리끼리 격돌할 때의 폐해는 중소 동물들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_본문 210쪽-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