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생물의 분비물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듯 공간에서 나오는 쓰레기는 생활의 증거이다. 치워도 또 나오고, 다시 치워도 계속 나오는 쓰레기 자체가 그 공간에 ‘생활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오랫동안 단독주택에 살다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집을 산 사람이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립주택을 지을 계획이라면서, 버릴 가구나 쓰레기를 굳이 치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중략) 무심코 쓰레기를 분리하다가 문득 ‘아 참, 이거 내버려둬도 되지. 청소할 필요 없지’ 하는 생각이 들면 아련하고 서운했다. 오랫동안 사용한 이 공간이 진짜 ‘사라진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p.6~7 <프롤로그: 청소가 끝난 자리에서>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은 세제가 담긴 스프레이를 바닥에 뿌리고 물기 없이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다. 이러한 방법이 효율성 측면에서는 물걸레질보다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물걸레질을 주된 청소 방법으로 하는 우리나라 가정집에서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지 않은 청량한 물이 더러움을 씻어내주어야 비로소 가장 깨끗해진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단순한 액체가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깨끗한 물을 떠놓고 소원과 안녕을 빌던 것은 물에 정화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p.22~23 <물은 가장 오래된 약>
하나하나 버리면서 공허함보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됐다. 나이가 들면서 ‘쓸모’의 많은 부분이 나의 집착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방감은 포기를 ‘선택’하면서 얻게 된다. 포기를 선택하는 것은 주체적인 삶의 방법으로, 집착해서 얻는 것보다 열등하지 않다. 샤키야족의 왕인 아버지와 코살라 왕국의 공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영원히 번뇌를 끊고자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출가했다. 싯다르타의 출가를 ‘마하비닛카마나(Mahabhinikkhamana)’라고 부르는데, 이는 ‘위대한 출가(the Great Departure)’ 또는 ‘위대한 포기(the Great Renunciation)’를 의미한다. 비움은 의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의도적이며 자발적인 행위다.
p.61 <비움으로써 다시 채우는 힘>
머물렀던 공간에는 나의 자취가 묻는다. 그 자취를 치우는 것은 미래의 내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따라서 청소는 과거에 내가 존재했던 증거를 돌아보는 일인 동시에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의 내가 하는 행위이다. ‘나는 청소한다. 고로 존재했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p.88~89 <자취를 치우는 이유>
청소를 하면서 의자를 옮기다 방문을 찍어 자국이 났다. 원목 문양의 깨끗한 방문에 자국이 나니 무척 신경이 쓰였다. 방문 앞을 걸레질할 때면 꼭 그 자국을 찾아봤다. 평소에는 들여다보지 않던 방문이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찍힌 자국을 자세히 보고 어루만지며 속상해했다. 그러고 나서 2주 정도 해외에 나가게 되었다. (중략) 평온하게 커피를 마시다가 문득 ‘아, 방문!’ 하는 생각에 찻잔을 내려놓고 문 앞으로 급하게 갔다. 하지만 문짝요정이 왔다 갔나 싶을 정도로 도무지 그 찍힌 자국을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 자국을 찾아내는 데 한참을 몰두했다. 마침내 자국이 나오자 반가움에 ‘아, 다행이다. 그렇지. 깜짝 놀랐네’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찬찬히 보니 그렇게 눈에 띄는 자국은 아니었다.
p.100 <상처를 위한 시간>
쌓았다 치우면 그만큼 명확하게 치워진 것을 알 수 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은 행복에 슬픔이 필수라고 했다. 슬픔이 없다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중략) 1985년 미국 미네소타주 램지종합병원의 윌리엄 프레이 박사 등 연구진은 육체적 자극에 의해 나온 눈물과 감정이 고조되어 나온 눈물의 성질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다. 양파를 잘게 썰어 눈가에 대고 흘린 눈물과 슬픈 영화를 보고 흘린 눈물을 채취해서 성분을 분석한 결과, 감정이 고조돼 흘린 눈물에만 카테콜아민이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 카테콜아민 호르몬은 몸속에 많이 쌓이면 다양한 질병을 야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물질이다. 슬픔을 표출하는 눈물은 몸속의 유해한 물질을 배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위로한다.
p.109~110 <더러워야 깨끗해진다>
아이가 인형에게 걱정을 말하고 베개 밑에 넣어두면 부모는 몰래 그 인형을 치워버린다. 그리고 인형이 아이의 걱정을 가져갔다고 말한다. 아이는 자신이 둔 자리에서 인형이 없어진 것을 보고 자신의 걱정도 함께 사라졌다고 확신하며 평온을 되찾는다. 그 인형들을 ‘걱정인형’이라 부른다. 구체화된 형태는 눈에 보이는 사실이므로 ‘치워진 사실’도 존재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치울 수 없다. 깨끗해진 것을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깨끗해졌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린 후에야 깨끗해진 자리를 인식할 수 있듯이, 걱정인형이 걱정을 갖고 사라진 자리에는 아이들의 미소가 남는다.
p.119~120 <걱정을 저장하는 인간>
가부장제 사회에서 청소를 비롯한 가사노동의 대부분을 어머니들에게 맡기면서 칭찬처럼 하는 말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기질이 가족을 보살피고 꼼꼼하게 청소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또 있었다. 산업혁명기 유럽의 굴뚝에서는 활발한 산업화의 물결을 증명하듯 끊임없는 잔재가 검은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그러다 보니 굴뚝을 청소할 일이 많아졌는데, 성인이 들어가기에는 좁았기 때문에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미성년자들이 들어가서 청소를 했다. 어린 소년들은 몸이 작고 불만을 표출하지도 않아 굴뚝 청소에 적합했다. 그 소년들은 피부암이나 호흡기 질환으로 죽어갔다.
p.128 <‘열심히’ 하는 것 중에 예외적으로 폄하되는 일>
유목민에게 넓게 드리워진 초원은 가축과 자신들을 위한 생명의 푸른빛이다. 담이 없기 때문에 마당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제한이 없다. 자연이 준 혜택의 푸른빛은 나의 것인 동시에 그들의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에게 함부로 무언가를 버리는 일은 어렵다. 외부로 배출되더라도 그 쓰레기는 여전히 자연이 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목민과 달리 정착민에게 버리는 것은 너무나 쉽다. (중략) 사실 청소는 내 집 안에 있던 쓰레기를 외부로 옮기는 일이다. 단지 우리가 외부의 자연과 사적 공간을 구분해, 담으로 둘러싸인 나의 공간에 있던 쓰레기가 밖으로 배출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깨끗해졌다고 느낄 뿐이다.
p.157~159 <담장 안의 청소와 담 너머의 청소>
‘타타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미한다. 이 앞에 부사가 덧붙는다면 그것은 ‘현재’일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을 맞고 비가 오는 날은 비에 젖는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한다. 청소를 도와달라는 어머니의 말에 나름의 반항이랍시고 한마디 하던 때가 있었다. 주로 어차피 내일 할 건데 뭐하러 오늘 또 청소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내일 먹을 건데 오늘 밥은 왜 먹냐?”로 대응하는 어머니의 승리였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매일 끊임없이 죽기 전까지 하는 것이 청소다. 그래서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말은 현재 살아 있기 때문에 당연한 말이다. 오늘의 청소는 어제의 청소와 다르다.
p.207 <‘그때’의 내가 아니다>
미국의 한 정신과 의사가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방법 중 효과적인 것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야구장에 가서 열렬한 함성과 응원을 쏟아내는 사람들 틈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방법으로 주변의 열정적인 기운을 체감할 수 있는 장소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일주일 내내 집을 대청소하는 것이었다. 구석구석 먼지를 떨어내고, 걸레로 가구와 바닥을 닦고, 쓰레기를 모아 버리면서 무거운 감정이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덜어내면 그 자리에 에너지를 채울 수 있고 다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다.
p.222 <에필로그: 걸레를 짜며, 다시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