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에 대한 잘못된 인식
_ 나르시시즘은 해롭지도, 자기 파괴적이지도 않다
오늘날 나르시시즘은 과도한 자의식, 이를테면 자화자찬, 이기주의, 자만심을 가리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습관처럼 셀카를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 자신의 편리만 생각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나르시시스트는 말에는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모든 나르시시즘이 허영심이나, 관심을 끌려는 행동으로 나타날까? 심리학계는 나르시시즘을 불쾌하지만 흔히 접할 수 있는 성격 특성으로 보기도 하고, 희귀하고 위험한 정신장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르시시즘을 바라보는 이런 다양한 시각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르시시즘은 전적으로 해롭고 파괴적이다’라는 인식이다.
저자는 이런 인식이 ‘틀렸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사실 나르시시즘은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나르시시즘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일 뿐이며(29p), 스스로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사교적이고 몸도 더 건강하다(30p). 저자는 보스니아 전쟁 생존자들과 9·11 생존자들을 대표적인 연구 사례로 들며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고도 앞날에 대응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밝힌다.
나르시시즘은 고치기 힘든 성격 결함이나 심각한 정신 질환, 또는 소셜 미디어를 타고 빠르게 확산되는 문화적 질병이 아니다. (…) 사실 나르시시즘은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은 인간의 충동 말이다.
실제로 지난 25년간 심리학자들은 대다수 사람이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확신한다는 증거를 엄청나게 많이 수집했다. 방대한 연구 결과, 심리학자들은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오만한 얼간이나 반(反)사회적 인격 장애자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_나르시시즘은 정상적인 인간 성향이다(29p)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자신이 전혀 특별하지도, 소중하지도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우울과 불안이 나르시시스트의 환상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심리학에서는 자신을 전혀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에코이스트’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가족이나 동료를 존중하고 칭찬할 가능성도 낮다. 사회적으로는 에코이스트의 판단이나 관점이 나르시시스트보다 더 정확한 경우가 훨씬 많지만, 에코이스트는 자신의 현실적인 시각과 판단 때문에 행복을 미루고 희생시킨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상을 ‘더 현명하지만 더 슬픈 효과’라고 부른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서든, 부모를 통해서든, 문화를 통해서든, 특별대우를 받고 싶어 하거나 특별히 관심 받고 싶어 하는 욕구는 나쁘다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넌 뭐가 그렇게 특별하니?”라는 말은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네가 뭔데 그렇게 특별한 사람처럼 굴어?”다. 전 세계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이타심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보편적 인식이다.
_나르시시즘은 하나의 스펙트럼이다(60p)
나르시시즘을 향한 뿌리 깊은 오해
_ 나르시시즘은 고정된 성격이 아닌, ‘성격 스펙트럼’이다
사람들은 확실한 구분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가득 차지 않았으면 빈 것이고, 흑이 아니면 백이며, 선이 아니면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세상이 분명해지고, 내 편과 네 편이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믿는다.
저자는 이렇게 단정 짓는 사고야말로 심리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강조하며, 나르시시즘도 같은 기준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첫째, 대부분의 인간 행동 모델이 정신 건강을 평가하는 기준이 ‘사고의 유연성’이고 둘째,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거나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극단적 나르시시스트, 극단적 에코이스트는 분명 존재하지만, 대다수 건강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나르시시즘 스펙트럼의 일정 범위 안에 머물며, 그 범위 안에서 스펙트럼의 좌우로 약간씩 이동하면 평생 살아간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 결과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이를테면 외로움이나 슬픔, 혼란에 빠져 있거나 정서적으로 약해져 있을 때는 나르시시즘이 극적으로 올라간다. 성인이라면 병에 걸리거나 이혼하는 등의 큰일을 겪을 때 자존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아집이 강해지곤 한다.
보통은 십 대 때 나르시시즘이 절정에 이른다. 청소년들은 흔히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확신하듯이 행동한다. 마치 자기가 자연법칙과 인간이 만들어놓은 법 위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_나르시시즘은 하나의 스펙트럼이다(64~65p)
나르시시즘을 둘러싼 오래된 논쟁
_나르시시즘은 어떻게 금기어가 되었나
나르시시즘이 결코 변하지 않는 성격도, 정신질환도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나르시시즘을 위험한 정신장애라고 여기게 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19세기 심리학자 하인츠 코후트(heinz kohut)와 오토 케른베르크(Otto kernberg)의 오랜 논쟁이고, 둘째는 1979년 등장한 ‘자기애적 성격 검사’의 세계적 돌풍이다.
먼저,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1898년, 당시 선구적인 성(性) 연구가였던 해블록 엘리스(havelock ellis)가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져’ 과도하게 자위행위를 하는 환자들을 ‘(그리스신화 속) 나르키소스와 비슷한’ 질병에 걸린 이들로 묘사했다. 1년 뒤 독일인 의사 파울 네케(Paul näcke)가 유사 ‘성도착(性倒錯)’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을 널리 알린 인물은 엘리스도, 네케도 아닌 정신분석학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프로이트는 1914년 〈나르시시즘에 관하여On narcissism: an introduction〉라는 논문을 써서, 나르시시즘을 ‘영유아기 때 자기 자신에게만 과도하게 집중하는 발달 단계’로 해석했고,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건강한 발달 과정일 뿐 아니라, 친밀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한 심리 요인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영유아기에 인간은 자신 안에서 세상이 시작되며, 최소한 세상의 흥미로운 것들은 모두 자신 안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1단계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다. 이 단계는 단순히 건강한 발달 과정일 뿐 아니라, 친밀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았다. (…)
그러나 프로이트는 성인의 나르시시즘을 즉각 비난했다. 만약 우리가 어린 시절의 특성을 버리지 않는다면, 허영심과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이어져서 현실에서 소외되고 과대망상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성인의 나르시시즘을 대하는 프로이트의 이런 이중적 시각은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_나르시시즘은 어떻게 금기어가 되었나(42~43p)
그런데 프로이트 이후 대표적인 정신분석가로 손꼽히는 ‘하인츠 코후트’와 ‘오토 케른베르크’는 ‘나르시시즘 해석’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두 사람 모두 오스트리아 빈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상당히 다른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1913년에 태어난 코후트에게 빈에서 자란 어린 시절은 예술과 학문에 대한 열정이 충만하고 희망과 번영이 가득한 세계였다. 반면 1928년생인 케른베르크에게 유년 시절은 나치의 지배를 받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코푸트는 인간의 본능을 희망과 열정의 시각으로 이해했고, 케른베르크는 공포와 절망, 적대적 감정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나르시시즘이 자존감과 자부심, 야망, 창의력, 회복력을 제공한다는 점에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지만,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시즘에 관한 입장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코후트는 극단에 치우친 나르시시즘에도 조금은 이로운 점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케른베르크는 이를 본질적으로 위험하고 해롭다고 강조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를 경험한 케른베르크는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정신분석가 수련기간 중에 겪은 일화도 인간의 본성을 비관적으로 인식하는 데 일조했다. 실제로 케른베르크가 전문가가 된 이후 처음 진료한 이들은 공격성과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심각한 정신 질환자들이었다. 케른베르크가 보기에 나르시시스트들은 부글부글 끓는 원한 덩어리이자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반면 코후트는 고급스러운 개인 진료실에서 특권층 환자들을 진료했다. 유년 시절 성장 배경의 차이와 정신분석가로서의 경험 차이가 두 정신분석가의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코후트와 케른베르크는 학회와 논문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며 팽팽한 싸움을 치렀다. 그러나 1981년에 코후트가 암으로 사망한 뒤 케른베르크는 학계의 주목을 홀로 만끽했고, 악성 나르시시즘에 관한 그의 견해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케른베르크의 견해는 역사가이자 사회 평론가인 크리스토퍼 래시(christopher Lasch)가 1979년에 발표해 인기를 얻은 《나르시시즘의 문화》를 통해 대중에게도 파고들었다. 이 책은 케른베르크가 제시한 파괴적인 나르시시즘의 무시무시한 이미지에 크게 의존했고, 마침내 대중의 마음속에서 나르시시즘은 악성 나르시시즘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_나르시시즘은 어떻게 금기어가 되었나(51p)
나르시시즘 열풍과 심리 검사의 만남
_자기애적 성격 검사(NPI)는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1979년 도입된 자기애적 성격 검사(Narcissistic Personality Inventory, 이하 NPI)는 심리학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기본 도구로, 수많은 심리학 전공자들이 관례적으로 이 검사를 받는다. NPI 검사는 두 문장이 한 쌍으로 구성된 40개의 문항을 읽고, 둘 중 자신을 더 잘 묘사한 문장에 체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예를 들면 ‘나는 내 몸을 조종하는 것이 쉽다/ 나는 특별히 내 몸을 과시하고 싶지 않다.’ 또는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쉽다/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식이다.
그런데 이 검사가 도입되고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NPI의 결함이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NPI 검사에서는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을 나타내는 진술에 동의할수록 나르시시즘 점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자기주장이 강하다’, ‘나는 리더가 되고 싶다’를 선택하면 나르시시즘이 높은 것으로 간주된다.
높은 자존감이나 행복한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수십 년에 걸친 심리 연구에서 수차례 확인되었고, 단순히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길 좋아하거나 책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조작이나 거짓말을 즐기는 나르시시스트와 확실히 다르다. 그런데 NPI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고 단지 체크한 항목만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의 피검사자들을 나르시시스트라고 평가함으로써, 소위 ‘밀레니얼 세대’일수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자 진 트웬지(Jean Twenge) 교수 역시 NPI 통계 결과를 바탕으로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는 나르시시즘 열풍을 지적하며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나쁜 행동의 원인을 나르시시즘으로 돌렸다.
저자는 NPI의 도입과 확산이 자기애가 높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을 예의 없고, 잘난 척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나르시시스트로 낙인찍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대중이 나르시시즘을 더욱 오해하는 결과를 빚었다고 설명한다.
트웬지의 이론은 미국의 급소를 찔렀다. (…) 자신은 특별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충격적인 이야기가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비서 업무는 하찮아서 자기 수준에 안 맞는다는 생각에 불만 가득한 얼굴로 게으름을 피우는 행정 보조원, 상사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순간에 우스갯소리를 하는 신입 사원, 회의 시간에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신입 사원까지, 트웬지 교수는 온갖 나쁜 행동을 나르시시즘의 영향으로 설명했다.
_나르시시즘은 어떻게 금기어가 되었나54p
일이든, 인간관계든 어떤 대상에게 강렬한 열정을 느낀다면, 나르시시즘이 약간 높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의 욕구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을 때는 자신을 기쁘게 하는 대상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솟아오르는 열정은 타인을 향한 배려나 관심과 균형을 이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으면 열정은 공허해지고, 심하면 파괴적이 되어 자신과 상대방을 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갖춘 사람들은 정신없이 놀이에 빠져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욕망을 정확히 알고, 따른다. 욕망에 집중할 때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고, 이러한 기분이 자신에게 얼마나 행복하고 열정적인 삶을 가져다주는지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나르키소스와 비슷하다. 인생이라는 숲속을 걷고, 그 길에서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재능과 욕망이 있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나르키소스가 숲에서 만난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얼굴이 비친 연못 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대신, 사람들 곁에서 함께 담소를 나누고 함께 밥을 먹고 그들에 관해 묻고 함께 길을 걸었다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생각해보라.
_행복하고 열정적인 삶(29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