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노 다케지 지역 민중 저널리즘상 대상 수상★
★제42회 고단샤 혼다 야스하루 논픽션상 수상★
★제20회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장려상 수상★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 이후,
재난이라는 글자 뒤에 가려진 작업자들의 면면을 살려낸 끈기와 집념의 르포르타주
이 책은 《도쿄신문》 사회부 기자인 저자가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2019년까지 9년간 원전 현장에 잠입해 숨겨진 진실을 끈질기게 파헤쳐나간 기록이다. 현재까지 인터뷰한 취재원만 100여 명, 취재 노트만 약 220권, 관련 기획 기사만 140여 회에 달한다. 저자는 사고를 축소하고 은폐하는 데 급급한 일본 정부, 해결된 게 하나도 없지만 점차 사고의 악몽을 잊어가는 국민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도 어떻게든 사고를 수습하려 노력하는 작업자들의 얼굴을 교차해 보여준다. 특히 일지 형식을 빌려 재난의 최전선에서 마치 일회용처럼 쓰이고 버려지는 노동자의 현실을 철저히 기록함으로써 그간 뉴스로만 접했던 ‘원전 사고’를 작업자 한 명 한 명의 얼굴로 생생히 복원한다. 잃어버린 삶의 터전과 참혹한 사고 현장을 낱낱이 파헤친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이들의 희생과 맞바꾼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지 질문한다.
▶ 책 속에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혼슈 동북부에 위치한 도호쿠 지방의 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30분~1시간 뒤 대형 쓰나미가 태평양 연안을 덮쳤다. 이때 나는 《도쿄신문》 나고야 팀의 사회부 기자로 나고야에 있었다. 마침 휴일이라 집에 머물 때였는데, 지진 직후 휴대 전화와 집 전화가 동시에 울렸다. 당장 신문사로 모이라는 소식에 서둘러 본사로 향했다.
이튿날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의 상황이 삽시간에 급박해졌다. 1호기 주변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어 노심 용융 가능성이 제기됐다. 부서가 어수선한 가운데 나는 “짐을 꾸려 곧장 도쿄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1시간 뒤 신칸센에 몸을 싣고 도쿄로 향했다. _ 28쪽, 〈들어가며〉
본래 냉온정지는 원자로에서 방사성 물질이 새어 나오지 않고 노심을 식히는 물이 100도 미만으로 내려가 원자로가 충분히 안정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1원전은 수소 폭발로 원자로 3기가 손상되어 방사성 물질을 계속 방출하고 있었다. ‘새어 나오는 것이 없는’ 밀폐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시 말해 ‘냉온정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냉온정지 상태’라는 비슷한 듯하나 실상은 전혀 다른 용어를 당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_ 33쪽, 〈들어가며〉
한편 작업자의 피폭이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피폭량이 워낙 높아 장기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쿄전력은 이대로라면 현장을 떠나야 하는 작업자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3월 15일에는 정부 특례로 후쿠시마 제1원전 긴급 작업의 방사선 피폭량 한도가 100mSv에서 250mSv로 상향 조정됐다. 이때 당국의 논의에서 상향 수치를 500mSv까지 올리고, 구명 작업 지원자의 피폭 한도를 무제한으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나 모두를 경악게 했다. 전문가 회의에서 시기상조라고 해 실시되지는 않았으나, 원전이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가운데 책임자들은 작업자의 생명을 희생시켜 눈앞의 위기에 대처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상정했던 것이다. _ 36쪽, 〈들어가며〉
“눈앞에서 누가 코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겁이 나겠지만 그런 일은 없거든요. 선량계가 삐삐 울리면 ‘방사선량이 올라갔구나. 빨리 지나가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것도 점점 익숙해지죠.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죠.” _ 48쪽, 〈2011년 – 원전에 일하러 온 이유〉
원전의 수주 구조는 처음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도쿄전력이 히타치나 도시바 같은 대형 건설 업체에 일을 발주하고, 그 아래에 1차 하청 업체와 2차 하청 업체를 비롯한 여러 기업이 연결된 다중 하청 구조다. 계약상 도쿄전력과 원청 기업은 3차 하청까지만 인정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7차, 8차 하청까지 줄줄이 얽혀 있다. …도쿄전력은 “원청 기업에 (공사의 제반 경비와는 별도로) 임금과 수당 할증분을 합친 ‘인건비’를 작업자 인원수만큼 지급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전 사고 후 도쿄전력이 지급한 인건비에는 ‘위험 수당’ 명목이 없어 할증분을 받지 못하는 작업자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다중 구조의 하위로 갈수록, 그사이에 개입하는 중개업자가 많을수록 중간에서 임금을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_ 54쪽, 〈2011년 – 원전에 일하러 온 이유〉
1년간의 피폭량이 높으면 다음 해에는 그만큼 피폭 허용치가 줄어든다. 선량 한도가 차면 일을 잃기 때문에 작업자에게 피폭량은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는 기업의 존속 문제로도 이어졌다. 한 영세 하청 업체 사장은 “피폭량을 관리해 계속 일할 수 있도록 스스로 지켜야 한다. 원전 사고 후의 피폭량은 사고 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정부와 도쿄전력이 피폭 작업자의 뒷일도 고려해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_ 77쪽, 〈2011년 – 원전에 일하러 온 이유〉
“유해를 찾았지만 방사선량이 높아 경계 구역 밖으로 모시고 나오지 못한 유족도 있었답니다. 얼마나 속상할지,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니.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닌데. 도쿄전력은 천재지변이라지만, 지진이나 쓰나미로 원전이 폭발해서는 안 되잖아요?” _ 93쪽, 〈2011년 – 원전에 일하러 온 이유〉
피폭 기록은 나중에 병이나 산재 신청을 할 때 작업자를 지키는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되지만, 동시에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일의 수명’이기도 했다. _ 117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체르노빌 사태 때도, 미국 스리마일섬 사고 때도 다른 나라 일이라고 여겨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어요. 정부와 전력 회사의 오만이 낳은 결과입니다. 절대로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배신감까지 들었습니다.” _ 119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후쿠시마에서 홀로 지내는 작업자는 “현지에서 내가 일할 만한 곳은 원전밖에 없다. 하지만 재가동은 반대”라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 원전이 안전하다고 믿어왔다. “속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최선을 다하면 원전 이외에도 전력을 얻을 다른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원전이 전부 멈춘 지금 생각해봐야 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우리 지역은 원전 덕에 살았고 원전 관련 일이 사라지면 곤란하다.” _ 131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총리는 오이 원전에 후쿠시마를 덮친 것 같은 쓰나미가 와도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했다. 동일본 대지진 전에도 원전은 안전하다고 했다가 이런 사고가 났다. 이제 누가 안전하다는 말을 믿을까? 원전을 가동하지 않으면 일본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고 하지만, 또다시 원전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일본은 더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된다. _ 137, 138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피폭량 감추기가 보도된 뒤 선량계 휴대 검사가 엄격해졌다. 작업장에 가기 전 확인하거나 선량계가 보이도록 가슴 부분을 투명 소재로 만든 방호복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작업자들이 훗날 피폭으로 발병할 경우 업무 연관성을 증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피폭량 수치를 스스로 속이는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따져보려는 시도도,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_ 148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원전에서 물은 ‘위험’을 의미한다. 지하로 내려간 3명이 발목까지 차는 물에 첨벙첨벙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위험을 알리고 싶었으나 전면 마스크를 쓰고 있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명은 장화를 신었으나 2명은 단화 차림이라 고농도 오염수에 발이 그대로 잠겼다. 이는 대량 피폭으로 이어졌다. 선량계 수치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_ 167쪽, 〈2012년 – 힘내라고 하지 마세요〉
확실히 도쿄에서 도쿄전력의 기자회견을 듣다 보면 후쿠시마 제1원전이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듯 착각하게 된다. ‘그렇구나, 원전 사고 직후와 비교하면 후쿠시마 제1원전 내 방사선량은 눈에 띄게 줄고 원자로 내부의 녹아내린 핵연료도 안정적으로 냉각되고 있구나.’ 그러나 실제로는 녹아내린 핵연료를 식히느라 날마다 오염수가 대량 발생하고 있었다. 후쿠시마 제1원전 경내의 탱크 약 1,000개에 처리 오염수 약 22만 t이 저장되어 있다. 2013년 이후에는 부지 10만㎡에 탱크를 증설해 저장 용량을 70만 t까지 늘릴 계획인데, 이마저도 2년 반이면 모두 찰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가운데, 1월 24일 원자력 규제 위원회의 검토 회의에서 도쿄전력 담당자가 “최종적으로는 관계자의 합의를 얻어 이러한 활동(정화 처리한 오염수 해양 방류)을 할 수 있으면 부지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다”고 발언했다. 후쿠시마 현지의 어협 등은 맹렬하게 반발했다. 최근 반년간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20km 떨어진 먼바다에서 잡은 쥐노래미에서 식품 안전 기준의 약 260배에 달하는 세슘이 검출되고 있었다. _ 176쪽, 〈2013년 – 엉망진창 오염수 처리〉
후쿠시마 제1원전을 떠난 이듬해 봄, 목욕을 하려고 벗은 속옷이 새빨갰다. 혈뇨였다.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갔고, 방광암 진단을 받았다. 1년 후, 도쿄전력이 부담하는 암 검진에서 대장암과 위암이 발견됐다. 가족력은 없었다. “거짓말이겠지.” 그는 진단 결과를 믿지 못하고 거듭 확인했다. 의사는 “틀림없습니다. 전이된 것이 아니라 각각 생긴 암입니다. 위는 완전히 들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처음으로 방사선 피폭과의 관련성을 의심했다. 의심은 점점 커졌다. 도쿄전력과 후생노동성 상담 창구에 전화를 했으나 “인과 관계를 알 수 없다”, “노동 기준 감독서로 가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항암제가 맞지 않아 방광도 적출했다. 대장도 절제했다. 그는 중도 장애자로 판정받았다. …보험이 있었음에도 의료비가 200만 엔이 넘었다. 그는 2013년 8월에 산재를 신청했다. …그는 자원이 아닌, 회사에서 가지 않으면 해고한다고 해 고민 끝에 간 것이었다. “그 선택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습니다. 후쿠시마에 간 걸 후회합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_ 272, 274쪽, 〈2015년 – 작업자의 암 발병과 산재〉
7월 하순은 특히 힘들었다. 전면 마스크를 쓰면 턱에 찬 땀이 참방참방 소리를 내면서 입으로 들어간다. _ 313쪽, 〈2016년 – 여기는 최전선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8년째, 인후암 진단을 받았다. 가족 중에는 암에 걸린 사람이 없다. ‘설마 내가?’ 목 폴립에서 생긴 출혈이 위에 가득 차 피를 토했고, 그 후 검사에서 암이라는 말을 들었다.
“왜 우리보다 먼저 암에 걸린 겁니까?” 지금도 현장에서 피폭과 싸우는 작업자들이 진심으로 걱정을 해줬다. 히로 씨는 이런 말을 했다. “가타야마 씨, 닫히는 문이 있으면 열리는 문도 있습니다.” 히로씨도 병으로 고통받던 때가 있었다. 이 말을 여러 번 되뇌며 가슴에 담았다. _ 426쪽, 〈나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