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 신앙위인 북스]
청소년들에게 믿고 따를 수 있는 대상을 소개하는 것은 아주 소중한 일이다. 꿈과 비전이 꿈틀대는 시기인 만큼 인생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믿음의 거장들의 일생이 생생하게 담겨 있는 이 시리즈를 통해 많은 청소년들이 바른 신앙과 인격을 배우고, 하나님나라의 주인공으로 자라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성경 말씀을 따라가면 반드시 승리해요!!
오직 성경만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 말씀으로 용기를 얻어 올바른 신앙으로 교회를 이끈 존 칼빈!
모든 사람에게 참된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탄 사람!
진리는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존 칼빈은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알고 그 진리를 발견한 후 모든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위해 맞서 싸우기 위해목숨을 내놓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모든 권위가 오직 성경에서 나온다고 믿는 진리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 17장 17절) 칼빈 씨,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당신을 귀하게 쓰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피하려 합니까? 당신은 참 비겁하군요.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왜 하나님의 때에 쓰지 못합니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학문을 저주하고 말 거요. 내 말을 똑똑히 새겨두시오.
파렐의 소리는 엄숙하면서도 확신에 차 있었으며 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고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서 쓰고 싶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목적지를 포기하고 제네바에 머물기로 했다. - 본문 중에서
[저자의 말] 복음 진리의 빛으로 교회를 변화시킨, 하나님의 사람
존 칼빈, 그가 종교개혁에 남긴 큰 업적은 아직도 놀라운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장례식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매우 초라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매우 간소하게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동시에 가장 훌륭한 제자였으며 또 최초로 그의 전기를 썼던 베자는 칼빈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묘사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태양이 이 땅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짧은 생애 동안에 이룩하여 놓은 복음적 정신은 이 세상에 훨씬 더 밝은 빛을 비추게 되었으니, 그의 죽음은 참으로 숭엄하기까지 했다.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크의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존 칼빈이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가지 않았다면 아마 이 땅에 오늘과 같은 개신교회가 생겨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칼빈 당시에는 종교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독일에서 제네바로 옮겨졌을 정도였다. 그는 개혁신앙의 창시자로서 역사 위에 그 위상이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그는 개신교의 원줄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생전에 프랑스로 들어가 활동하는 여러 개혁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글을 보낸 적이 있다.
여러분이 박해를 이겨내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주님처럼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승리의 보장입니다.
반대파의 수많은 방해와 위협 속에서도 묵묵히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목표를 바라보며 나아갔던 그의 삶과 신앙의 행적은, 거짓 신앙이 가득 찬 오늘날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며, 동시에 능히 세상을 이길 힘을 준다. - 오병학
존 칼빈 (John Calvin, 1509~1564)
장로교의 신학을 세운 프랑스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개혁자이다. 1509년에 프랑스의 작은 도시 누아용에서 태어난 칼빈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차근차근 그 길을 밟으며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요청으로 오를레앙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부르주로 옮겨 계속 법학을 공부하던 중 그는 회심하고 개혁신앙을 따르게 되었다. 1533년 니콜라스 콥의 파리 대학 학장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준 칼빈은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여 거기서 《기독교강요》를 집필, 초판을 펴냈다. 그는 기욤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건너가 목회하며 본격적인 개혁운동에 임했다. 제네바를 그리스도의 정신이 지배하는 복음의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엄격한 개혁에 반발하는 시민 반대에 부딪쳐 제네바를 떠나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렀다. 그러나 1541년에 제네바 시의회의 초청으로 다시 제네바에 부임하여 교회 조직을 정비해나갔다. 반대파의 계속되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에 합당하게 살도록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로 개혁신앙운동을 이어나갔다. 칼빈은 신학과 교리만이 아닌 거룩한 신앙과 삶까지 강조한 목회자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며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성경에 있음을 선언했다. 그는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정통했고 법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논리 전개 역시 매우 치밀했다. 그의 지성이 참 진리로 무장되었기 때문에 대표작 《기독교강요》를 비롯해서 수많은 성경 주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