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 『논어』, 『순수이성비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시대의 고전 100권으로 읽는 인류 지성사의 대도감
철학의 문턱을 낮추고, 생각의 깊이를 높이다!
◎ 도서 소개
인류 사상의 기틀을 잡은 철학 책 100권
세계 지성의 지도가 보이는 사상 읽기 안내서
『철학의 정원』은 세계 지성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철학서 100권을 한 권에 담아낸 철학 입문서다.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위대한 사상가들의 궤적을 따라 그들의 핵심 사상과 맥락을 쉽고 간결하게 풀어냈다. 철학 용어를 최소화해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으며, 철학이 인간과 사회를 바꾸고,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경로를 철학자의 핵심 저작을 통해 배워나갈 수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21세기북스의 책들
▶ 불안의 끝에서 쇼펜하우어, 절망의 끝에서 니체 | 강용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0월 | 22,000원
▶ 허무감에 압도될 때, 지혜문학 | 김학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9월 | 18,800원
◎ 본문 중에서
덕을 사랑하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흔들림 없이(아파테이아) 살아가는 일이다. 선이란 그런 것이다. 내면에 아파테이아를 갖지 못하면 인생이 경쟁과 분주함, 욕망으로 가득해져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므로, 결국 자신의 삶이 없어진다.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세네카_23쪽】
“위대한 사상은 심장에서 온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현실 세계의 우연성에 놀라고, 그 놀람으로 심장이 요동치는 순간이야말로 철학 사상의 진정한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연이란 무엇인가』 구키 슈조_53쪽】
대개 사람들이 우정이라 여기는 것은, 사실 평소의 습관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어떤 계기를 통해 가까워진 상대를 자신의 일상적 습관에 따라 당연한 듯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이해득실에 따라 맺어진 관계마저 우정이라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그런 관계는 우정이라기보다는 동맹 혹은 계약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거나 고립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주변 사람들 덕분에 생겨나는 자존감, 그 관계에서 얻는 작지만 실질적인 이익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 관계를 ‘교우’라 착각한다.
【『우정론』 아벨 보나르_59쪽】
초인은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사람이며, 설령 인생이 똑같이 되풀이되는 영원회귀가 찾아오더라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존재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자신이 원했던 것이라고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초인은 구원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_93쪽】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기억이 먼 과거의 추억이었고 그것을 지금 이 순간, 불현듯 떠올렸다는 최근의 기억이 ‘지금-여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억 속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에 과거로 ‘점프’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모든 주의가 그 떠올림에 집중되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한다. 결국 이러한 기억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현존의 이마주와 기억의 이마주를 구별하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송_166쪽】
개인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사회적인 계약을 맺는다. 그것이 법이다. 그러면 국민은 자신의 이득만 생각했던 때보다 한층 도덕적으로 살아간다. 루소는 이미 18세기에 민주주의적 사상을 제안한 것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거스르는 사상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각자에게 어울리는 직업과 장소가 결정되어 있다는 중세의 고정관념을 당연히 여겼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 루소_255쪽】
건강이란 공적인 기준이 아니다. 지금의 상태에 적응한 새로운 평형 상태가 건강이다. ‘장거리 주자의 규범은 단거리 주자의 규범이 아닌’ 것처럼, 자기 자신의 이전의 규범에 따라서, 또는 자신의 연령에 따라서 규범을 바꿀 수 있다면 건강한 것이다. 자신이 노화했을 때 노화한 규범의 상태가 되면 건강하다. 그 규범을 타인이나 자신의 장년기와 비교한들 의미가 없다. “(그 사람의) 건강은 시작된 파괴 위에서 (그 사람이) 회복한 균형”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 조르주 캉길렘_345쪽】
왜 불안을 느끼는 것일까?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자각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본래적인 존재 방식이 지속되는 상태를 ‘퇴락Verfallenheit’이라 불렀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퇴락’의 상태로 일상을 살아간다.
한편, ‘현존재’의 본래성을 일깨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음만큼은 타인이 대신해줄 수 없으며, 철저히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본래적인 사건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다.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_3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