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움직인 건 임금이 아니라 재상이었다!
조선 통치의 중심에 섰던 명재상 20인의 통치술과 사상
◎ 도서 소개
나라를 움직인 건 임금이 아니라 재상이었다!
조선 통치의 중심에 섰던 명재상 20인의 통치술과 사상
『이한우의 조선 재상 열전』은 조선 통치의 최정점에 섰던 명재상들의 통치술과 사상을 새롭게 조명한다. 우리는 보통 조선의 역사를 말할 때 몇몇 임금과 성리학자, 장군을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로 국가 운영의 중심에 있었던 재상들은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이는 학문적 연구가 현실 정치보다는 성리학적 담론에 치우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를 이끌어간 것은 바로 경세가로서의 재상들이었다.
저자 이한우는 꾸준한 고전 연구와 번역을 통해 성리학적 명분론의 틀에 갇힌 전통적 신하관을 넘어, 현실 정치에 능한 재상의 면모를 탐구해왔다. 이번 책에서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 20인을 선정해, 그들이 어떻게 시대를 읽고 정치적 전략을 펼쳤는지를 입체적으로 분석한다. 재상은 단순히 충성심과 절개만으로는 부족하며, 청절(淸節)과 법치, 술책의 균형을 통해 현실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조준, 하륜, 황희 등 조선의 명재상들은 덕망과 실무 능력, 학식을 갖춘 인물들로, ‘의정부 삼상’이라 불린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자리에 올랐다. 이 책은 이들이 모신 임금과의 관계, 당시 정치적 맥락, 그리고 동시대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재상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한우의 조선 재상 열전』은 과거를 단순히 복기하는 작업을 넘어, 미래의 정치인을 길러내는 데 필요한 ‘재상학’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덕목과 이상론에 치중하는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현실과 권도를 아우른 유능한 정치가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에도 유효한 통치의 지혜를 전한다.
◎ 본문 중에서
유소의 『인물지』 유형론에 따르면 조준은 도리가 깊고 견실해 청절가(淸節家)로 손색이 없고 법제를 개혁해 민생을 이롭게 했으니 법가(法家)의 면모 또한 분명한 데다가 큰 결단을 의심 없이 내릴 줄 알았으니, 술가(術家)의 계책을 갖추고 있어 국체(國體)에 이른 조선 1호 재상이라 할 것이다.
제1장 태조의 공신이자 명재상 조준 - 44쪽
그러나 결국 성종은 한명회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한명회는 이미 성종의 그 같은 유약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한명회의 인간과 사리(事理)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사건이다. 한명회는 성리학의 교조에 얽매이지 않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왕조 시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정점에 이른 독특한 존재다. 정승이 되는 길은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다.
제7장 포의에서 단숨에 정승에 오른 책략가 한명회 - 143쪽
가장 중요한 원칙은 ‘치중화(致中和)’로 올바른 화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침이 바로 구목이다. 첫째, 궁궐 내의 기강은 엄격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宮禁不可不嚴], 둘째,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고[紀綱不可不正], 셋째, 인재를 잘 가려서 쓰지 않으면 안 되고[人才不可不辨], 넷째, 제사를 격식에 맞도록 제대로 거행하지 않으면 안 되고[祭祀不可不謹], 다섯째, 백성의 곤궁함을 구제해주지 않으면 안 되고[民隱不可不恤], 여섯째,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밝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敎化不可不明], 일곱째, 형벌을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고[刑獄不可不愼], 여덟째, 사치는 금하지 않으면 안 되고[奢侈不可不禁], 아홉째 신하들이 간하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諫諍不可不納].
제12장 난세를 넘긴 명재상 이준경 - 220쪽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강화론을 내지 못할 상황에서 그는 당당히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했다. 병자호란이 임박한 인조 14년(1636년) 11월 8일 최명길은 일관되게 청나라의 침략을 당해낼 능력이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화친을 추진했는데 부교리 윤집(尹集)이 소를 올려 최명길을 성토했다. “옛날 화의를 주장한 자 중에 진회(秦檜)보다 더한 사람이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언어와 사적(事迹)이 사관(史官)의 필주(筆誅)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로서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은 명확합니다. 대체로 진회로서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차마 했으니,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진회만도 못한 자라는 뜻이다.
제18장 백성을 전란의 도탄에서 구해낸 실사구시 재상 최명길 - 330쪽
최석정에 대한 신뢰는 장희빈 사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았다. 본인이 구상하는 정국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재상이 바로 최석정이었기 때문이다. 숙종 28년(1702년) 12월 2일 숙종은 최석정을 서용(敍用)할 것을 명하고서 다시 판중추에 제배했다. 최석정은 일단 진천에서 소를 올려 면직을 청했다. 숙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듬해 2월 11일 최석정을 다시 영의정에 임명한다. 이때부터 최석정은 영의정 폐출과 임명을 반복하게 된다. 숙종 31년(1705년) 4월 13일 다시 최석정을 영의정으로 삼자 『실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숙종과 최석정이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평이라고 하겠다.
제23장 숙종 때 열 번 이상 영의정에 오른 최석정 - 4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