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실을 알리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기록 이 책은 <노근리 이야기> 1부 《그 여름날의 기억》의 주인공이자 원작자인 정은용의 아들 정구도 가 쓴 《노근리는 살아 있다》를 원작으로 한 만화이다. 노근리사건은 반세기 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슬픈 기억이자 아픈 상처였다. 하지만 피해자대책위는 굳은 의지로 사건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 냈다. 아버지 정은용과 아들 정구도는 누구보다 이 일에 앞장섰다. 정구도는 증거를 찾기 위해 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진 지 석 달여 만에 노근리사건을 기록한 <조선 인민보> 기사를 발견한다. 그 기사를 바탕으로 사건을 알려 나가던 가운데 AP통신 보도를 통해 노근 리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국내외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언론의 도움으로 참전 미군들 증언도 확보하게 되고,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노근리 관련 비밀 문건도 증거 자료로 찾아낸다. 그 문서에서 전쟁 시 우발적으로 사건이 일어났음을 주장하던 미국의 입장과는 달리 미군 지휘계통에 따라 민간인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이 상부에서 내려왔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증거 자료와 증언을 확보 하고도 싸움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을 상대로 한 싸움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숱한 좌절과 끝나지 않은 싸움으로 인한 괴로움의 시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자국민의 아 픔을 외면하는 한국 정부의 무능함……. 그래도 피해자대책위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했 다. 그 결과 2004년 2월,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근리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노근리는 이제 인권과 평 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노근리 특별법에 따라 사건 현장 일대에 4만여 평 부지에 노근리 평화공원을 세웠다. 미군에 의해 인권이 짓밟힌 처참한 학살의 현장이 지금은 평화교육과 인권회복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했다. 노근리사건이 일어난 지 50여 년 만에 피와 땀으로 이루어 낸 성과였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역사 전쟁’이자 ‘인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노근리평화연구소 는 지금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싸움의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의 교과서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뼈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일이다.
서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가 총을 들고 전쟁 연습을 하며,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또 지구 반대편에서는 아직도 전쟁으로 목숨을 잃는 사 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노근리를 기억하는 것에는 우리 나라와 세계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학살 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평화의 가치가 담겨 있다. 누구도 들어 주지 않던 일들을 세 상에 알리고, 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불편한 일들을 곱씹으며 기억하는 것은 바로 평화의 가 치를 되새기기 위해서이다.
∎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되짚어 본다
• 이른바 ‘혈맹’이라 일컬어지는 한미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한국 전쟁 이후 우리 정부는 미국 정부에 대해 소극적 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았다. 자국민이 엄청난 재앙을 당했는데 상대에게 제대로 따지지 못한다면 얼마나 굴욕 적이며 비정상적인 관계인가. (본문 181쪽) • 교전도 없는 상황에서 미군들이 우리의 형제, 아들딸들을 짐승 도살하듯 무자비하게 죽였는데, 이를 국방부가 정 확히 규명하여 한을 풀어 주고 피해보상을 받게 해 주진 못할망정 ‘보상을 받기 위해 고의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니……. (본문 328쪽)
예로부터 전쟁을 겪어 보지 않고 순하게 살아온 노근리 사람들은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어디로 피난을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미군들이 우리를 위해 싸우러 왔다기에 마을 사람들을 도와줄 거 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미군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그러다 몰살을 당했다. 수백 명이 아무 까닭 없이 죽임을 당하던 가운데 이 사람들을 지켜 주는 아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국민들을 버리고 도망친 정부는 자국민이 어디에서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노근리사건을 알리고, 진상을 파헤치는 일 또한 피해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 낸 성과이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1960년, 미군에 소청을 제기했다가 기각 당한 뒤로 한국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기 나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가해 당사자들의 무시와 정부의 무관심은 피해자들한테 사건 자체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이런 무책임한 정부의 모습은 전쟁이 끝난 뒤 60년 이상 지난 오늘날까지도 바뀌지 않고 있다. 아 픔을 가진 사람들이 직접 싸움에 나서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한국 전쟁 당시 식구를 잃고 정부와 미 국을 상대로 싸우는 노근리 피해자들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과, 위로받지 못한 채 고통스런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흘린 눈물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 책은 뼈아픈 역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픔을 되짚어 보고, 현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일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