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싯줄이 가늘고 낚싯밥이 환히 보이면 작은 물고기가 먹고, 낚싯줄이 조금 굵고 낚싯밥이 향기로우면 중간의 물고기가 먹고, 낚싯줄이 굵고 낚싯밥이 풍성하면 큰 물고기가 먹습니다. 물고기가 이 낚싯밥을 먹으면 마침내 낚싯줄에 끌려가고, 사람이 이 녹봉祿俸을 먹으면 마침내 군주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낚싯밥으로 물고기를 취하면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녹봉으로 사람을 취하면 사람을 모두 취할 수 있고, 자기 식읍食邑으로 남의 나라를 취하면 남의 나라를 점령할 수 있고, 자기 나라로 천하를 취하면 천하를 다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육도직해六韜直解≫ <문도文韜 문사文師>)
“성왕聖王이 용병用兵을 하는 것은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요, 장차 포악함을 주벌하고 난리를 토벌하려고 해서이다.” (≪삼략직해三略直解≫ <하략下略>)
가장 권위 있는 주석서註釋書의 완역完譯
중국 송宋나라 때에 역대의 여러 병서兵書 가운데 최고만을 정선하여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간행한 바 있다. ‘경經’이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경칠서’는 유가儒家의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버금가는 병가兵家의 경전經典이었던 것이다. 명明나라 때의 유인劉寅은 이 ‘무경칠서’를 직접 풀이하여 ≪칠서직해七書直解≫로 간행하였고, 그 뒤로 ≪칠서직해≫는 명나라와 조선에서 무과武科의 필수 교재로 채택되어 가장 널리 읽힌 병서가 되었다.
이번에 본회에서 간행한 ≪역주譯註 육도직해六韜直解·삼략직해三略直解≫는 전통적으로 가장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유인의 직해본直解本을 저본底本으로 삼아 경문經文과 직해直解에 현토懸吐하여 완역完譯하고 역주譯註한 책이다.
≪육도六韜≫, 병학兵學의 시조始祖인 태공망太公望의 병서兵書
≪육도≫는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과 태공망太公望이 병사兵事에 대해 문답하는 형식으로 기술된 병서兵書이다. 흔히 ‘육도삼략六韜三略’ 또는 ‘도략韜略’이라 하여 ≪삼략三略≫과 함께 병칭되어 병서나 병법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했는데, ≪육도六韜≫의 도韜는 ‘숨기다, 감추다’의 뜻으로 ‘활집’을 뜻하는 도弢자와 같은 뜻이며, ≪삼략三略≫의 략略과 같이 ‘병법, 책략’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 현재 전하는 ≪육도≫의 구성은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호도虎韜>, <표도豹韜>, <견도犬韜>의 6권 60편으로 되어 있으며, 분량은 약 16,800여 자로 다른 병서와 비교해볼 때 꽤 많은 분량이다.
≪육도≫의 저자는 주나라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저자만으로 볼 때 무경칠서武經七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병서兵書라 하겠다. 그러나 저자와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중국의 여타 고서古書들처럼 논란이 있어왔다. 일반적으로, ≪육도≫는 병학兵學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태공太公의 사상을 바탕으로 전국시대戰國時代와 한漢나라를 거치면서 당시 병법을 연구하던 사람들의 의견이 보태지기도 하고 산삭刪削되기도 하여 현재와 같은 60편으로 정리되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손자孫子≫가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등 제가諸家의 사상을 아우른 통치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과 달리, ≪육도≫는 공수攻守와 방어防禦, 용병用兵에서 실전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을 자세히 거론하여 장수가 익혀야 할 필수과목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왔으므로, 위서僞書 논란에도 불구하고 무경칠서의 하나로 뽑힌 것이다.
≪삼략三略≫, 치국양민治國養民의 통치서
≪삼략≫은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이라고도 불린다. ‘삼략’이란 제목은 ‘세 가지 책략’이란 의미로 책의 구성 자체가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의 3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4,000여 자의 적은 분량이다.
이 책은 진한秦漢 교체기에 한漢나라의 책사였던 장량張良이 전수받은 황석공黃石公의 병서兵書라고 전해지고 있다. 병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병서와 달리 전쟁이나 용병의 전술이 아니라, 고서古書를 인용해 천도天道를 따르고 현인賢人을 등용하고 인재人才를 선발하는 중요성을 기술한 부분이 대부분이다.
“<상략上略>은 현자를 예우하고 상 주는 일을 진설하고 간웅姦雄을 변별하고 성패의 자취를 드러냈으며, <중략中略>은 덕행德行을 구별하고 권변權變을 살폈으며, <하략下略>은 도덕道德을 말하고 안위安危를 살피고 현인賢人을 해치는 잘못을 밝혔다. 그러므로 인주人主가 <상략>을 통달하면 국정國政을 현자에게 맡기어 적을 사로잡을 수 있고, <중략>을 통달하면 장수를 어거하여 무리를 거느릴 수 있고, <하략>을 통달하면 성쇠盛衰의 근원을 밝게 알고 나라를 다스리는 기강紀綱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삼략≫ <중략>)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삼략≫은 치국양민治國養民의 통치서와 같은 성격을 띠면서 유가儒家와 법가法家, 도가道家의 사상을 전부 아우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병서들과 달리 증주본增註本과 언해본諺解本이 여러 차례 간행될 정도로 널리 애독된 병서이기도 하다. 이처럼 ≪삼략≫이 여러 차례 언해되고 간행된 이유는 그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무과武科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면서 다른 병서에 비해 내용적으로 중요한 통치철학統治哲學을 담고 있다는 점과 함께, 비교적 분량이 적어 공부하고 암기하기에 편리했다는 면도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이에 무인들이 공부하기 쉽게 언해諺解와 소주小註가 달린 책이 많이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
우리나라에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이 언제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을 통해 보면 고려 초부터 병서兵書의 대명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융王融이 지은 김부金傅에게 내리는 교서에 ≪육도≫와 ≪삼략≫을 흉중에 품고 있다는 표현을 썼으며,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용도龍韜>의 계책을 익혔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태종 때 ≪육도≫와 ≪삼략≫을 무경칠서의 하나로 존중하여 무과의 시험과목으로 삼아서 그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무학武學을 익히는 무인뿐 아니라 문인도 문무文武의 견식을 겸비한다는 입장에서 널리 읽어왔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주洪奭周는 <삼략정언발三略精言跋>에서, “≪육도≫와 ≪삼략≫은 모두 한漢나라 이후에 지어진 책이지만, ≪육도≫의 문장이 지리한 반면 ≪삼략≫의 문장은 간략하다. ≪육도≫는 병사兵事에 대해 말한 것이 많고 ≪삼략≫은 치국治國을 논한 것이 많으며, ≪육도≫는 전적으로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숭상하고 ≪삼략≫은 오히려 정도正道에 가깝다. ≪삼략≫에서 아첨하는 간신과 강성한 귀족의 폐해를 말한 부분은 매우 절실하고 분명하니, 백대가 지나더라도 폐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육도≫보다 ≪삼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숙종 때 학자인 윤휴尹鑴도 <삼략발三略跋>에서, ≪삼략≫이 패자霸者에게 필요한 책이기는 하지만 쇠퇴한 세상을 구제하고 다스리는 데 나름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그 효용성을 인정한 것을 보면, 조선朝鮮에서 ≪삼략≫이 단순한 병서로만 취급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