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에게 물었다.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사광이 대답하였다.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정치(政治)를 간결하고 번거롭지 않게 하여 백성을 널리 사랑하는 데 힘쓰고 어진 이를 뽑아 맡기는 일을 서두르며, 귀와 눈을 넓게 열어 만방(萬方)의 일을 살펴야 합니다. 유속(流俗)에 단단히 빠지지 않고 측근에 얽매이지 않으며, 마음을 활짝 열어 멀리까지 내다보고 우뚝하게 자신의 주장을 세우며, 자주 관리(官吏)의 공적을 살펴서 신하 위에 군림해야 하니, 이것이 임금이 지켜야 할 조목입니다.”
평공이 말하였다.
“훌륭한 말이다.” -권1 <군도(君道)>
제 환공(齊桓公)이 대신(大臣)들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여 정오쯤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관중(管仲)이 뒤늦게 도착하자 환공이 술잔을 들어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였는데, 관중은 술을 반만 마시고 반은 버렸다. 환공은 말하였다.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하여 벌주를 마시면서 술을 버렸으니 예의에 있어 옳은 일이오?”
이에 관중은 대답하였다.
“신(臣)은 들으니, 술이 입에 들어가면 많은 말이 나오니, 말이 많이 나오면 말실수를 하게 되고, 말실수를 하면 몸을 버린다고 합니다. 신(臣)은 몸을 버리는 것보다 술을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환공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중부(仲父)는 일어나 자리에 들어가 앉으시오.” -권10 <경신(敬愼)>
통치자의 교과서
≪설원(說苑)≫의 저자 유향(劉向, B.C. 77~B.C. 6)은 서한(西漢)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경학(經學), 문학(文學), 그리고 목록학(目錄學)에 걸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 책에는 중국 고대(古代)로부터 시작하여 유향이 살던 한(漢)나라 때까지의 갖가지 교훈적 일화(逸話)와 명언(名言), 경구(警句)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를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문답과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구성함으로써 유가(儒家)의 통치이념과 윤리도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까닭에 중국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히고 국가적으로 여러 차례 간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책은 정치 일선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 책에 실린 일화와 명언, 경구들이 왕의 입장에서는 신하들에게 교시(敎示)를 내리거나, 신하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데 적절한 자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설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도 ‘통치자 자신의 수신(修身)이 정치적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라는 데 있다.
역사적 인물 사이의 대화 형식
이 책은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임금 노릇하는 도리부터 시작하여, 신하 노릇하는 방법, 근본을 세우는 것, 절의를 지키는 것, 덕을 귀중히 여기는 것, 은혜에 보답하는 것,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 인재 등용, 충직한 간언(諫言), 근신과 겸손, 설득력 있는 언설(言說), 사신(使臣)의 도리, 올바른 권모와 지략, 공평무사(公平無私), 국가적 위기를 대비하기 위한 무력(武力), 자연현상, 예악문물(禮樂文物), 실질(實質)의 중요성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대체로 대화(對話) 형식을 빌려 서술되어 있으며, 이 대화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과 사실성이 뒷받침되어, 독자들이 더욱 생생하고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고대 문헌의 고증 자료
≪설원≫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고증 자료로써의 방대함에 있다. 선진시대(先秦時代)로부터 한대(漢代)까지의 다양한 자료들이 실려 있어, 경서(經書)를 비롯한 여타 고대 문헌들의 자구(字句)와 명물(名物) 등에 관한 각종 고증 자료로도 많이 인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맹자요의(孟子要義)≫,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시경강의(詩經講義)≫, ≪상서고훈(尙書古訓)≫, ≪매씨서평(梅氏書平)≫, ≪춘추고징(春秋考徵)≫, ≪상례사전(喪禮四箋)≫ 등 자신의 주요 저서에서 ≪설원≫을 고증의 중요한 출처로 인용한 바 있다.
현재 통행본의 근간이 된 고려본(高麗本)
현재 통행되고 있는 ≪설원≫은 고려(高麗)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이 근간이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송(宋)나라 초기에 이 책을 간행할 때, 마지막 편인 <반질(反質)>이 빠져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을 보충하는 일은 고려에 있던 책을 입수함으로써 가능했다. 고려 선종(宣宗) 8년(1091), 송나라에서는 고려 사신을 통해 고려에 있는 100여 종의 서적을 요구하였으며, 이 속에 ≪설원≫ 20권이 들어 있었다. 고려에서 이 요구에 응함으로써 고려본 ≪설원≫이 송나라에 유입되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송나라에서는 완질(完帙)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훗날 돈황 석실의 문헌에서 ≪설원≫ <반질>편 잔권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현전하는 판본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고려본이 온전한 판본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수용과 보급
≪설원≫이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수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고려 건국 이전에 이미 많이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설원고려본설(說苑高麗本說)>에서 “낙랑(樂浪) 때 조공(朝貢)을 하면서 혹 ≪설원≫의 비본(秘本)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송나라에 다시 바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유추하였다.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4권 덕종(德宗) 3년(1034)의 아래와 같은 언급이다.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성종(成宗) 때에 내외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의 육정(六正)․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 자사(刺史)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할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제6대 군주인 성종(재위 981~997) 때 이미 ≪설원≫은 국가 공공기관에 지켜야 할 강령으로 게시될 만큼 보편적으로 읽혔음을 알 수 있다. 풍속을 교화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이보다 더 간명하고 핵심적인 조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