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은 사람 성품의 根本이고, 음악은 덕의 精華이며, 金․石․絲․竹은 樂器이다. 詩는 그 사람의 뜻을 말하고, 노래는 그 사람의 소리를 읊는 것이며, 춤은 그 사람의 동작을 표현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가 마음에 근본하고 난 뒤에 악기를 따라 연주한다.
이 때문에 感性이 깊으면 나타나는 형식이 밝고 기세가 성대하면 교화의 효과가 신묘하다. 화평하고 온순한 감정이 마음속에 쌓여서 아름다운 형태가 밖으로 표현되어 나오니, 음악만은 허위로 할 수가 없다. 음악은 마음이 감동하여 생기는 것이고, 소리는 음악의 밖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며, 音色과 연주는 소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君子는 마음에 감동하고, 음악으로 표현하고서 그런 뒤에 아름답게 다스려 꾸미는 것이다. 이 때문에 먼저 북을 쳐서 경계하며, 세 번 발을 들어 춤추는 방향을 보이며, 一節을 마치고 재차 시작하여 가는 곳을 드러내며, 曲을 마치고 정리하여 자리로 돌아가서 춤사위가 빨라도 지나치게 빠르지 않고, 음악이 지극히 은미하여도 감추지 않는다. 그러니 홀로 그 뜻을 즐거워하고, 그 正道를 싫어하지 않으며, 그 정도를 빠짐없이 시행하고, 개인적인 욕망을 따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자 도의가 확립되고, 음악을 마치자 덕이 높아진다. 군자는 음악으로 선을 좋아하고, 소인은 음악으로 허물을 듣는다. 그러므로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은 음악이 가장 위대하다고 하는 것이다.
-권19 <수문(修文)>
통치자의 교과서
≪설원(說苑)≫의 저자 유향(劉向, B.C. 77~B.C. 6)은 서한(西漢)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경학(經學), 문학(文學), 그리고 목록학(目錄學)에 걸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 책에는 중국 고대(古代)로부터 시작하여 유향이 살던 한(漢)나라 때까지의 갖가지 교훈적 일화(逸話)와 명언(名言), 경구(警句) 등이 망라되어 있으며, 이를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문답과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구성함으로써 유가(儒家)의 통치이념과 윤리도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까닭에 중국은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히고 국가적으로 여러 차례 간행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책은 정치 일선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이 책에 실린 일화와 명언, 경구들이 왕의 입장에서는 신하들에게 교시(敎示)를 내리거나, 신하의 입장에서는 왕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데 적절한 자료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설원≫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도 ‘통치자 자신의 수신(修身)이 정치적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라는 데 있다.
역사적 인물 사이의 대화 형식
이 책은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임금 노릇하는 도리부터 시작하여, 신하 노릇하는 방법, 근본을 세우는 것, 절의를 지키는 것, 덕을 귀중히 여기는 것, 은혜에 보답하는 것,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 인재 등용, 충직한 간언(諫言), 근신과 겸손, 설득력 있는 언설(言說), 사신(使臣)의 도리, 올바른 권모와 지략, 공평무사(公平無私), 국가적 위기를 대비하기 위한 무력(武力), 자연현상, 예악문물(禮樂文物), 실질(實質)의 중요성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는 대체로 대화(對話) 형식을 빌려 서술되어 있으며, 이 대화는 실존했던 역사적 인물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이 책에 실린 이야기의 역사적 신빙성과 사실성이 뒷받침되어, 독자들이 더욱 생생하고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고대 문헌의 고증 자료
≪설원≫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고증 자료로써의 방대함에 있다. 선진시대(先秦時代)로부터 한대(漢代)까지의 다양한 자료들이 실려 있어, 경서(經書)를 비롯한 여타 고대 문헌들의 자구(字句)와 명물(名物) 등에 관한 각종 고증 자료로도 많이 인용되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도 ≪맹자요의(孟子要義)≫,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시경강의(詩經講義)≫, ≪상서고훈(尙書古訓)≫, ≪매씨서평(梅氏書平)≫, ≪춘추고징(春秋考徵)≫, ≪상례사전(喪禮四箋)≫ 등 자신의 주요 저서에서 ≪설원≫을 고증의 중요한 출처로 인용한 바 있다.
현재 통행본의 근간이 된 고려본(高麗本)
현재 통행되고 있는 ≪설원≫은 고려(高麗)에서 소장하고 있던 책이 근간이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송(宋)나라 초기에 이 책을 간행할 때, 마지막 편인 <반질(反質)>이 빠져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을 보충하는 일은 고려에 있던 책을 입수함으로써 가능했다. 고려 선종(宣宗) 8년(1091), 송나라에서는 고려 사신을 통해 고려에 있는 100여 종의 서적을 요구하였으며, 이 속에 ≪설원≫ 20권이 들어 있었다. 고려에서 이 요구에 응함으로써 고려본 ≪설원≫이 송나라에 유입되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송나라에서는 완질(完帙)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훗날 돈황 석실의 문헌에서 ≪설원≫ <반질>편 잔권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현전하는 판본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고려본이 온전한 판본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적 수용과 보급
≪설원≫이 우리나라에 언제 처음 수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고려 건국 이전에 이미 많이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은 <설원고려본설(說苑高麗本說)>에서 “낙랑(樂浪) 때 조공(朝貢)을 하면서 혹 ≪설원≫의 비본(秘本)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송나라에 다시 바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유추하였다.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4권 덕종(德宗) 3년(1034)의 아래와 같은 언급이다.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성종(成宗) 때에 내외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의 육정(六正)․육사(六邪)의 글과 한(漢)나라 자사(刺史)의 육조령(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할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제6대 군주인 성종(재위 981~997) 때 이미 ≪설원≫은 국가 공공기관에 지켜야 할 강령으로 게시될 만큼 보편적으로 읽혔음을 알 수 있다. 풍속을 교화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이보다 더 간명하고 핵심적인 조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