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적 진보사상가의 명문장
유종원柳宗元(773~879)은 중국 중당기中唐期의 사상가이자 문장가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자字는 자후子厚이며 유하동柳河東, 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르고 장안長安 출생이다. 그는 총명한 자질로 경經∙사史∙자子∙집集을 두루 독파하여 높은 학식과 사상을 겸비하였으며, 명문가의 자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로서의 입지가 탄탄하였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추진력이 있었다. 고문古文의 대가로 한유韓愈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한유가 전통주의인 데에 반하여, 유종원은 유儒불佛도道를 참작하고 신비주의를 배격한 자유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서로 대립하였다.
혁신적 진보주의자였던 그는, 영정혁신永貞革新의 주역으로 부패한 정치를 혁파하고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만약 영정혁신이 성공하고 계속 정계를 주도했더라면 당唐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의 모범이 되고 그는 명재상이 되었을 것이다.
유종원은 여러 작품을 통해 위정자를 비판하고 현실을 반영하였으며 자신의 감정을 술회하였는데, 그 자구字句의 완숙미와 표현의 간결정채함은 특히 뛰어났다. 시詩는 산수山水의 시에 특히 능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조정에서 밀려나 먼 남쪽 지방에 유폐된 상황에서도 작품을 통해 민생의 고단한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여건에서 보다 나은 세상을 이루고자 온 힘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古文을 일으키다
유종원은 어릴 적부터 문장을 지었으나, 일종의 바둑이나 장기 두는 놀이 정도로 여기고 그다지 노력을 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장안長安에 있을 당시에는 문장으로 명예를 얻고자 하지 않았고, 그가 지닌 역량을 정사에 반영하여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다가 지방으로 폄적貶謫되어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자, 비로소 그것을 문장에 담아 후세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저술에 전념하였다.
그는 그저 어구語句만 화려하게 꾸미고 채색을 입히며 운율을 맞춰 흥이나 돋우는 등 형식에 치중한 문장은 의미가 없다고 반대하고, ‘문장으로 도를 밝힌다[文以明道].’는 구호를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옛 성현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고 그 속에 담긴 다양한 도리를 근간으로 삼아 자신이 표출하고자 하는 생각을 용의주도하게 써내었다.
유종원이 한유와 함께 일으킨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있어서 최대의 공헌은 고문 성향의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이다. <천설天說>, <봉건론封建論>, <비국어非國語>, <포사자설捕蛇者說>, <단태위일사상段太尉逸事狀>, <송청전宋淸傳>, <재인전梓人傳>, <검지려黔之驢>와 <영주팔기永州八記> 등은 인류의 문화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사고와 의식 향상에 지대한 기여를 함으로써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실패와 진보적 성향 등의 이유로 그의 인격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한유에 비하여 박하였는데, 맨 먼저 유종원을 위해 억울함을 씻어준 사람은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었다. 그는 “뜻을 구사한 것이 정밀하고 터득한 도道의 경지가 높다.” 하면서 비범한 인물이라고 칭송하고, “≪당서唐書≫에서 이들에 관해 서술한 내용이 거칠고 순수하지 못한 것은 그 개혁이 실패한 것으로 인해 올바로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진연陳衍은 ≪석유실논문石遺室論文≫에서 “유종원의 수준에 쉽게 미칠 수 없는 요소가 몇 가지 있다. 붓을 들어 단어를 구사할 때 털끝만큼도 속기俗氣가 없는 것이 하나이고, 짜임새가 자신만의 모습을 이루는 것이 둘이고, 타고난 자품이 높아 식견이 일반인과 다른 것이 셋이고, 근거가 분명하여 남들이 감히 언급하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넷이고, 독서량이 방대하여 글을 쓸 때 남의 것을 굳이 표절하지 않는 것이 다섯이다. 이 다섯 가지는 창려昌黎(한유韓愈)의 단점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율곡선생이 극찬한 당나라 선비의 찬란한 문학
우리나라에서 유종원의 문장은 학습의 필수교재로 인식되었다. 세종世宗은 두보杜甫의 시와 함께 한유, 유종원의 문장을 반드시 익히도록 권고하였으며, 중종中宗 18년(1523) 대제학으로 있던 이행李荇은 유종원의 문집을 교서관校書館에서 더 많이 인쇄하고 부족한 것은 구입해 오자고 했다.
이처럼 유종원의 문장은 조선 초기부터 반드시 익혀야 할 문장의 모범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문집인 ≪당유선생집唐柳先生集≫, ≪유문초柳文抄≫, ≪유유주시집柳柳州詩集≫ 등이 널리 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의 문장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다수 수록되어 있어 널리 읽혀졌다.
유종원은 그저 단순한 문장가가 아니다. 그의 수준 높은 문장은 그가 생각하는 도道를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만약 그가 행운아로 정치 현장에서 그의 이상을 어느 정도 구현했더라면 굳이 수준 높은 문장을 쓸 이유가 없어 대문장가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율곡栗谷선생이 말하기를 “선비에게는 다행과 불행이 있다. 세상에 그 누가 때를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때를 못 만난 것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만 가끔 때를 만나 불행하고 때를 못 만나 다행한 경우가 있으니, 세상사를 어찌 일률적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유자후柳子厚는 변방 황무지로 귀양 가서 죽었지만 문학文學과 문장文章을 후세에 찬란하게 남겼으니, 이것은 때를 만나지 못해 다행한 경우이다.” 하였다.
유종원은 바른 생각과 이상적인 철학을 지니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한 인물로, 그 인물 자체가 모든 사람이 따르고 배워야 할 표상이었으며, 그의 문장은 자신의 사상을 용의주도하게 표현하여 강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닌 명문이었다. 비록 때를 만나지 못해 이상 정치를 실현하지 못하였지만, 진보와 혁신을 담은 그의 사상과 따뜻한 인간애人間愛에 바탕을 둔 명문장을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