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집해韓非子集解≫, ≪한비자韓非子≫ 연구의 종합서
≪한비자≫는 법가法家의 대표자인 한비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당唐나라의 이찬李瓚이 처음 ≪한비자≫를 주석하였으며, 이후로 청淸나라의 노문초盧文弨, 왕염손王念孫, 유월兪樾 등이 정리․교감하였다. 청나라 말에 이르러 왕선신王先愼이 제가諸家들의 원문을 종합․교감하여 1895년 ≪한비자집해≫를 완성하였다.
왕선신은 당시 학계의 태두泰斗로 인정받던 왕선겸王先謙의 종제從弟로, ≪한비자≫ 판본 가운데 가장 선본善本인 건도본乾道本을 중심으로 여섯 가지 이상의 주요 판본을 비교하여 오류를 바로잡았다. 이 책은 ≪한비자≫ 최초 주석인 이찬의 주를 그대로 싣고, 그간 여러 학자들이 제시하였던 주석이나 교감을 반영한 뒤 왕선신 자신의 종합적인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한비자≫ 연구의 결실을 이루었다는 의의가 있다. ≪한비자집해≫는 한비자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기본서가 되어 현재까지도 ≪한비자≫ 연구의 대표서로 인정받고 있다.
한비자韓非子와 ≪한비자韓非子≫
한비자(B.C. 280~B.C. 233)는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무렵인 전국시대 말기 인물로, 이름은 비非이며 한韓나라 공자公子출신이다. 한비자에 관한 기록은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에 상세하게 보이며,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한세가韓世家>․<육국표六國表> 등에서 산견散見된다.
≪사기≫에 의하면 한비의 저술은 생전이 이미 세상에 알려져, 진 시황秦始皇이 ≪한비자≫ <고분孤憤>과 <오두五蠹>를 보고 감탄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韓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가운데 최약체였을 뿐 아니라 중원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강성해져가는 진秦나라의 위협에 안심할 수 없었다. 이에 한비자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한나라를 보존해야 함을 역설하다가, 그의 벗인 이사李斯의 꾐에 넘어가 옥獄에서 독을 먹고 자살한다.
≪한비자≫는 55편 2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로부터 <고분孤憤>, <오두五蠹>, <내저설內儲說>, <외저설外儲說>, <설림說林>, <세난說難>은 한비자가 직접 지은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지만, 제가의 고증에 따르면 이외의 편들은 한비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진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학자들은 특히 의심스러운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비자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한비자≫에는 한비자가 처음 진나라에 가서 진 시황을 만나 유세한 기록을 담은 <초견진初見秦>과 한나라를 멸망시키지 말고 보존해야 함을 주장한 <존한存韓>이 가장 처음에 위치해 있다. 이외 각 편의 순서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며, 편명은 각 편의 내용을 대표할 만한 단어로 선정되어 있다.
한비자韓非子와 법가사상法家思想
한비자는 법가法家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비자 이전에 법치法治를 주장한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신도愼到 등이 있었으나, 유독 한비자를 법가의 대표 사상가로 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한비자는 그의 스승인 순자荀子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禮’에 의한 교화敎化에 역점을 둔 순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상賞과 벌罰을 수단으로 하는 ‘법法’에 의한 다스림을 주장하였다. 한비자는 <육반六反>에서 부모가 아들과 딸을 대하는 태도가 ‘계산적인 마음[計算之心]’에서 나옴을 주장하면서 상벌의 효용效用을 역설하였다. 결국 정령政令으로 계도하고 형벌刑罰로 다스려야 천하의 태평을 보증할 수 있으며, 군주는 도덕이나 인륜적 교화에 힘쓸 것이 아니라 ‘세勢’에 의지하고, ‘술術’을 쥐며, ‘법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법을 강조한 상앙과 술을 강조한 신불해, 세를 강조한 신도의 사상이 한비자의 통치술로 융합된다. 이후 한비자의 사상과 그의 저술 ≪한비자≫는 법가 사상을 종합한 결과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사기≫에서 그의 사상이 노장老莊에 뿌리를 두었다고 평가한 대목이다. ≪한비자≫에는 최초의 ≪노자≫ 주석인 <해로解老>와 <유로喩老>가 존재하며, <양권揚權>과 <주도主道>에도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인용하고 있는 점이 확인된다. 결국 한비자가 추구한 법치는 궁극적으로 인위성이 배제된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도치道治’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 속으로
“병이 있는데도 잠시의 통증을 참아내지 못하면 편작扁鵲의 뛰어난 의술을 시술할 수 없고,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귀에 거슬리는 말을 수용하지 못하면 성인聖人의 충심을 잃게 된다.”
- 제25편 <안위安危> 중에서
“군주의 근심은 <불러도> 호응하는 사람이 없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한 손으로만 손뼉을 치면 아무리 빨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고, 신하의 근심은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왼손으로는 네모를 그리면 둘 다 완성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 제28편 <공명功名> 중에서
“위 사공衛嗣公이 말하기를 ‘사슴을 닮은 말이라면 천금千金의 값을 매기겠지만, 백금百金의 가치가 있는 말은 있어도 천금의 가치가 있는 사슴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말은 사람에게 쓰임이 되지만 사슴은 사람에게 쓰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하였다.”
- 제34편 <외저설 우상外儲說 右上>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