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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난중일기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소장종이책 정가11,700
전자책 정가30%8,190
판매가10%7,380

난중일기작품 소개

<난중일기>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그날 무얼 하고 있었을까? <난중일기>에 따르면 전날과 같이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을 쏘았다.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로 그의 관할 구역을 지키고 있었고, 경상 좌수사 박홍과 경상 우수사 원균이 부산에서 왜적을 맞아 대패하고 도망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임진왜란의 명장으로 일컫는 ‘이순신’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난중일기>는 ‘성웅聖雄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나게 하는 책이다. 거기에 이 책의 참 의미가 있다. <난중일기> 속의 이순신은 단순히 군사를 호령하고 함대를 이끌고 왜적을 쳐부순 무패의 장수가 아니었다. 이순신은 부하였던 이의 궁핍한 사정에 기꺼이 옷을 벗어 주고,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고, 부하가 다른 장수를 욕하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오랜 싸움에 몸져눕기도 하는 인간이었다.


출판사 서평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을 얼마나 잘 담아내고 있을까?

<난중일기> 하면 누구나 기대하는 것이 익히 들은 당포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이다. 일기는 그 전쟁 상황을 얼마나 박진감 있게 그리고 있을까? 그러나 <난중일기> 속 해전은 대개 생략되어 있거나 너무나 간략하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큰 싸움을 앞둔 장수에게 일기를 자세히 쓸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_ 난중일기>는 주요 해전 부분, 일기가 오랜 기간 빠져 있는 부분에 이순신의 장계를 넣었다. 왕께 올린 이순신의 장계에는 각 싸움의 시작과 진행 상황,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이와 잘못을 한 이, 적의 움직임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새롭게 옮긴 송찬섭은 벌써 10여 년 전 일간신문을 통해 <난중일기>를 소개한 바 있다. 그때 송찬섭은 <난중일기>를 찾아 읽으면서, 뜻밖에 대중이 즐겨 읽을 수 있을 만큼 <난중일기>의 번역본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1960년대 이은상 씨가 중심이 되어 국역본 <난중일기>를 간행했고 이를 답습한 책들도 여러 권 출판되기는 했다. 이은상 씨의 번역본은 상당히 잘 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에 있어서 수정하거나 통일시켜야 할 부분도 있고 책의 중요성이나 자료적 성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그래서 <난중일기>를 새롭게 내 보자는 생각에 일기 초본을 직접 간행한 <난중일기 친필초본>(1977년)을 구하여 작업을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_ 난중일기>는 대중이 좀더 쉽게 읽도록 월별로 주요한 사건을 잡아 제목을 붙여 주었으며 사진이나 해전 상황 지도 자료를 넣었다. 또 큰 싸움을 앞두었을 때나, 싸움 중에 이순신이 장기간 일기를 쓰지 못한 때에는 장계와 주를 적절히 삽입하여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난중일기>의 첫 번째 가치, 사료史料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 주는 일기로서, 전란 전반을 살피는 사료史料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정치?경제?사회?군사상뿐 아니라 조선 수군 연구와 전략, 전술에 대한 기록이다. 중앙과 감영, 수영, 읍진을 잇는 통치 체계, 체찰사, 순찰사, 순변사, 수사, 만호 등의 군령 체계, 그 밖에 각종 어사, 선전관, 의금부도사 등 중앙 관리가 파견되어 통제하는 실상이 기록되어 있고, 이를 통해 당시 국방 운영 체계와 그러한 일을 책임진 유성룡, 이원익, 이수광, 유몽인, 윤두수, 남이공, 박홍로 등의 전쟁 중 활동도 볼 수 있다.
또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반 병사의 활동도 엿볼 수 있다. 당시 수군 자체가 천한 역이었듯이 병사들은 천민이 많았다. 거북선을 만들거나 활, 화살, 총포 등 군기를 만들던 장인들의 활동, 심지어 그가 고심하여 잠 못 이룰 때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어 주면서 위로하였던 부하들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꼼꼼하게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
관직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참여한 의병들도 있다. <난중일기>에는 조선시대 천대받던 승려들이 만든 의병 부대(승장 삼혜와 의능) 그리고 성응지 등 여러 의병 부대가 나온다. 또 군량을 조달하거나 둔전을 경영하는 등 수영의 재정을 마련하는 방식도 상세하게 나타난다. 전쟁을 치르려면 재정이 필요하고 특히 백성들을 진정시키려면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줘야 했던 것이다. 둔전은 이런 점에서 매우 필요하였다. 같은 이유로 바다에서 전복이나 미역을 따고 생선을 잡는 일 등도 매우 중요하게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난중일기>의 두 번째 가치, 문학성

이순신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그러한 면모는 <난중일기> 속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난다. 그의 일기는 진중 생활 중 때때로 이순신은 수루에서 달빛을 즐기거나 홀로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1593년 7월 15일 일기를 보면,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 나그네의 가슴이 어지럽다. 혼자 배의 뜸 밑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몹시 산란하다. 달빛이 뱃머리에 들고 정신이 맑아져서 누워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느덧 닭이 울었다.”라고 쓰여 있다.
또 1595년 9월 14일에는 함경도에서 고락을 같이했던 선 수사에게 선사한 시를 보면 이러하다.
“북쪽에 갔을 때도 고락을 같이하고, 남쪽에 와서도 생사를 함께하는구나.(北去同勤苦 南來共死生)
오늘 밤 달빛 아래 한 잔 술을 나누고 나면, 내일은 이별을 아쉬워하겠구나.(一杯今夜月 明日別離情)”
굳이 한산도 제승당 수루 현판에 걸려 있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하는 시를 읊지 않아도, 간결하고 서정성 넘치는 그의 일기는 충분히 문학적, 예술적이다.


<난중일기>의 세 번째 가치, 이순신

이 책이 갖는 최고의 가치는 역시, ‘이순신이 쓴 이순신의 일기’라는 점이다. 영웅으로 또는 남들보다 조금 더 자의식 강한 인간으로도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그 시작은 <난중일기>다.
<임진년 아침이 밝아오다 _ 난중일기>가 주목하는 이순신은 ‘인간’이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신중하게 싸움을 준비하고, 부모를 걱정하다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매일같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전쟁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꿈에 이야기가 왕이 피난 가신 일에 미치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고, 아들을 떠나 보내놓고 걱정스러워하고, 홀로 어머님 생각에 눈물 흘린다. 그러나 적에 맞서 싸울 때는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작은 일일망정 용서치 않겠다.” 라고 외치며 아군의 10배가 넘는 적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다. <난중일기> 속에는 그러한 이순신의 여러 모습이 여실하게 담겨 있다.

진중에서 이순신은 늘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며 소식을 기다렸다. 이순신은 1593년 5월에 초4일 일기에, “오늘은 어머니 생신이건만 적을 토벌하는 일 때문에 가서 축수의 술잔을 드리지 못하게 되니 평생 유감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모함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풀려나와 백의종군 중 어머니 상을 당한 1597년 4월 19일의 일기는 이러하다.
아들과 조카에 대해서도 이순신은 늘 염려하고 따스하게 보살폈다. 또 그의 병사나 동료, 궁핍한 백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596년 1월 23일 일기,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1597년 5월 13일 일기, “이중익이 군색한 말을 많이 하므로 옷을 벗어 주었다.” 하는 등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에게 이렇게 자상한 면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병사가 백성의 것을 훔쳐 먹었을 때는 엄하게 벌하고 대신 갚아 주기도 하는 철저한 조선의 관리이기도 했다.
또 진중 생활을 하는 가운데 종종 점을 치기도 한다. 아마도 힘들고 고독한 가운데 스스로를 위로받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아들 면의 아프다는 소식에 점을 치고는 “군왕을 만나 보는 것 같다.”거나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라는 괘를 얻고는 좋아했다. 전쟁의 상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에 어떤 사람이 화살을 멀리 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이 갓을 발로 차서 부수는 꿈을 꾸고는, 화살을 멀리 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갓을 발로 차는 것은 적의 괴수를 모조리 잡아 없앨 징조라고 풀이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못마땅해하거나 부하들이 다른 장수를 흉보는 것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일기에 따르면 여러 지휘관들이 원균의 잘못이나 흉을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으며, 이순신은 그런 원균을 ‘可笑(가소롭다)’라고 표현하였다. 이 표현은 이순신이 몹시 못마땅할 때 쓰는 욕으로서 대부분 원균에게 쓰였다.

싸움에 임했을 때의 이순신의 용맹과 전략은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1592년 4월 임란 전에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그는 방어용 성과 못 그리고 봉수대 등을 수리하고, 전라좌도에 속한 녹도, 발포, 흥양, 여도, 방답 등 다섯 진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병선과 무기를 점검하였다. 군사 훈련도 철저히 하여 특별히 날씨가 나쁠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군관들에게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그 자신도 공무를 마치면 수시로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활쏘기는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화화 무기가 승패를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임을 알고, 전쟁 전에도 또 전쟁 중에도 무기 개발에 힘썼다. 이순신과 절대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거북선 건조도 그러한 준비로부터 가능했다. 1591년 전라 좌수사가 되었을 때 이순신은 전쟁을 직감하고 새로운 배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그 배는 판옥선과 같은 한선 위에 쇠로 된 뚜껑을 만들어 덮었으니, 형상이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았다. 배의 이름은 자연스레 거북선이 되었다. 거북 모양의 돌격용 전선은, 사실 조선 초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그러나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 만들어 실용화한 것은 ‘이순신’이다.
그리고 전쟁에 임하여서는 물러섬이 없었다. 1597년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대패로 거의 초토화된 수군을 수습하여 한 척의 거북선도 없이 오직 전선 13척을 가지고 명량 싸움에 나섰다. 그때 적의 함대 수백 척을 보고 겁을 먹은 거제 현령 안위가 도망하려 하자 이순신은 뱃전에서 그를 불러 크게 꾸짖었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저자 프로필

이순신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2014.11.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李舜臣, 본관 : 덕수(德水),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편역 : 송찬섭
1956년 부산 출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이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현재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 역사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성과를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 1988년 만들어진 역사학연구소 또한 중요한 활동의 장으로 삼고 있다. 주요 저작은『1862년농민항쟁』(공저),『조선 후기 환곡제 개혁 연구』,『농민이 난을 생각하다』, 『현장검증 우리 역사』(공저)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조선 사회 정책사』가 있다.

목차

글을 시작하기 전에
『난중일기』와 이순신에 대하여
일러두기
1592 년 왜적의 침략이 시작되다
1593 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1594 년 명·일 간에 강화가 진행되다
1595 년 휴전 상태가 계속되는 속에서
1596 년 왜적이 드디어 철수하다
1597 년 백의종군에 나서다
1598 년 마지막 싸움에 나서다
임진왜란 주요 사건 연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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