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난다의 시의적절, 그 열두번째 이야기!
시인 고선경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12월의, 12월에 의한, 12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29.9세에는 0.1을 찾아 헤매볼 것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12월에게 배운 가능성이다
2025년의 마지막 달, 난다 시의적절 시리즈 12월의 책은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고선경 시인의 두번째 산문집 『29.9세』다. “퉁치면서 눙치고, 관(貫)하면서 통(通)하는 ‘행운’의 의미를 농담과 엮어내는 시적 패기”(정끝별, 이문재)로 시의 미래를 예고했던 그는,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문학동네, 2023),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열림원, 2025) 등으로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끌어안았다. 고선경은 이번 책에서 이십대의 끝을 마주하여 가슴 떨리게 설레고, 손에 땀을 쥐도록 긴장하느라 자주 우스워졌던(「나 여기 살아」) 시절의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기억을 시와 산문, 편지, 일기 등으로 담아냈다. 시인에게 12월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0.1의 가능성에 기대어 영영 꿈꿔볼 수 있는 달이다. 온몸을 던져 끌어안고 싶은 사랑의 마음을(「원하기도 전에 이미 사랑하고 있어」) 곱씹고 되돌아보는 한 해의 마지막이자, 이십대의 마지막 달. 눈보라와 입김과 흰빛과 체리 향과 함께 흩어지는(「스노우볼」), 황량하고 아름다운 겨울날. 시인은 술에 취해 고꾸라지느라 커다란 보랏빛으로 피멍이 들었던 무릎과(작가의 말) 순식간에 어질러진 마음처럼(「Winter Baby」), 여전히 감추고 싶은 부위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구질구질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무수한 실망을 겪고도 여전히 기대를 건다. 동경과 열등감에 찬 짝사랑에 시달리고, 좋아하는 아이돌을 가까이서 볼 수 없어 가슴 아파하면서도 그저 그런 간식을 보다 맛있게 먹을 방법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다(9일 산문). 한겨울 빙판길 위에서 많이 미끄러진대도(「나 여기 살아」), 실망하고 상처받고 다시 기대하느라 헐어버린 마음을 애착하며(「너에게 기대」) 계속해서 살 수 있도록.
내 꿈은 사람을 사랑하기를 관두지 않는 것
나는 이 꿈이 다치지 않도록 잘 돌보고 싶다
시인은 어렸을 때 서른 살이 되면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서른 살은 아득했고 쉽게 다가올 것 같지 않았으며 상상 속에서는 아주 휘황하기만 했다. 하지만 서른 살 고선경은 어떻게 해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지를 궁리하는(「나의 겨울 무덤」) 사람, 어딘가 흉흉하거나 기이하고 미치게 재미있는 소문처럼(20일 편지) 글쓰는 사람일 뿐. 어릴 적 그렸던 이상향의 서른 살과는 한참 멀리 있지만, 시인은 한결같이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받을 묘책을 꾸민다. 요즘은 구체적인 사랑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맞잡았던 손을 놓아줄 때, 읽을 수 없는 지문이 내 손에서 흘러내릴 때처럼(27일 산문) 애정의 모양이 느껴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나요? 시인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집에서 콜라를 나눠 마시다가 티셔츠에 흘려버려 잔소리를 들으면서, 프랭크 오하라나 제임스 테이트 시를 볼 때보다 재미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나는 이 사랑이 거의 통증처럼 반짝인다고 느껴」). 설령 세상은 좋은 세상을 꿈꾸지(「12월 블루스」) 않는다 해도, 도무지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이다(31일 산문). 그는 무엇도 감싸거나 포장할 수 없는 사탕 껍질 같은 기억들까지(「청포도향 따위가 났을 리는 없지만」) 끌어안고 차츰 서른을 향해간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인데,
네 미래의 시는 아마 너를 기대하고 있을 거야
안 쓰고 망하는 건 열받는다. 그러니 시인은 안 써진다고 실망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만큼만 쓴다(21일). 그가 미래로 가기 위해서는 ‘실제로 매일 쓰지 않더라도 매일 쓸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 믿음은 너무 멋지거나 너무 앙상하거나 너무 멋지면서 앙상한(7일 산문) 생각들이 좋아하는 마음을 경유해 시가 되어가는 일과 닮아 있다. 수많은 창작의 순간은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분명히 심상찮은 데가 있는 사랑의 힘에 빚진다(14일 일기). 이따금 엄마나 아빠가 안타깝게 놓치고 만 미래를 가늠해 보는 일(「우리의 코미디」), 신년 운세를 보러 갔다가 마뜩잖은 점괘를 받고 약간 침울한 기분이 되는 일들은(20일 산문) 시를 씀으로써 너무 솔직해서 말이 되지 않는 말들, 때로는 어이없거나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말들로(27일 산문) 구체화된다.
시인은 사랑받고 싶은 아등바등과 애걸복걸이 징그럽다고 말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꺼내보이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사랑의 존재 증명이자 시적 용기가 되지 않을까. 많이 후회하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운 다음에도 여전히 여분의 삶과 여분의 우리가 있으리라(20일 편지). 그러니 ‘겨울을 견뎌본 심장’(『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으로 한껏 꿈꾸고 한바탕 춤추는 거다. 풍파를 견디고 더욱 강해진 모양으로 빛나는 딸기 한 알처럼, 한없이 기쁜 마음으로 미래를 연장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건 흔히 주어지지 않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벅차고 눈부신 건 아니다. 때로는 이 일이 나를 지치게도 하고 내가 이 일을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한, 일의 어려움에 대한 불평은 함부로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 원래 사랑이란 언제나 경이로움과 피로감이 동반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이 일을 오래오래 사랑할 궁리를 하고 있다.
―12월 16일 산문, 「29.9세」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