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라고는 하나 말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말보다 살찐 망아지를 사랑하는 사람임을 어쩌겠는가
모르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처음 같을까?
알 것 좀 안다 싶어지고 나니
그 세월 참 추웠겠다 싶네 그 쓸쓸
“눈은 천 개, 발은 만 개, 마음은 한 그릇 물처럼 한곳에서 찰랑이는 시인 김민정”(박연준). 시인을 본업으로 편집자를 주업으로 삼는 김민정의 신작 산문집 『말이나 말지』가 출판사 난다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1월 1일부터 11월 10일까지 한국일보 ‘길 위의 이야기’ 코너에 열한 달 동안 매일같이 실었던 글 266편을 한데 묶었다. 680자라는 네모난 지면에 맞추어 일요일과 추석 연휴를 빼고 매일 쓰기를 했던 그다. 코너명에 걸맞게 원고를 컴퓨터가 아닌 길 위에서 휴대전화 블랙베리 자판으로 찍어 보내며 성실한 마감을 했다. 길 위에서의 다급한 통화나 펄쩍펄쩍 뛰는 말처럼, “하루가 인생의 다인 것처럼”(315쪽) 순간순간 살아간 기록이다. 마트의 말끔히 깐 도라지가 아니라 흙이 그대로 묻은 시장의 도라지(33쪽) 같은 글이다. 인정머리로는 타고난 힘이 장사였던 김민정. 삶에 있어 ‘인정’과 ‘머리’를 최우선에 두는 걸 순리로 알고는 살았다는데, 그가 680자로 포착해 시시콜콜 펼쳐 보이는 우리네 풍경은 경쾌한 웃음 속 비릿한 비애를 목젖 깊숙이 느끼게 한다.
평생 땀에 절은 작업복 입은 노동자 아버지의 딸로 살았던 시인의 눈이 향하는 건 사소하다 싶은 사물과 반복되는 정직한 일상이다. 그는 아이들과 나란히 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사다리차를 구경하다 일층에 도착한 짐들의 남루함을 본다. “몇 알 안 달린 포도송이에 굳은 인절미에 봉지 반쯤 남은 쌀에 냄새나는 김치통까지.”(271쪽) 일회용으로 치부해버리기 일쑤였던 우산. 그러나 우산이 아니라면 명품 정장도 구두도 마음도 죄다 젖어 그저 바들바들 떨어야 할 우리……(286쪽) 우리들의 지갑, 저 안에 종잇장 두둑 채우려고 아등바등 매일같이 조금씩 늙어왔던 걸까(218쪽). 기쁨보다는 슬픔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짙은 그늘로 드리워진 우리 길. “삶의 반대말이 죽음이 아니라 포기라는 격려가 흔해빠졌다 한들 위로가 되지 못할 법은 아니지 않는가.”(357쪽) “여러분, 부디 돌이킬 수 없음을 돌이키는 헛됨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시라. 누구든 밥 세끼 먹고 산다. 누구든 안 죽는 사람 없다. 매일같이 오늘의 해가 어김없이 뜨노니!”(354쪽) “김치나 떡을 포장할 때 마지막 겉옷이 되어주던 보자기”(330쪽), 그 갖가지 문양과 패턴들이 절묘한 비례로 조각보를 이루도록 천 하나하나를 꿰맨 시인의 손이 귀하다.
그게 사는 거다 싶더라고. 왜 혼나는 기분일까
내가 삶을 두고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던 걸까
“할말이 앞선다 해도 참아야 하는 말의 귀함”(326쪽). “이해와 오해라는 양 라켓 사이에서 핑퐁 소리를 내며 잘도 튀는 말의 그러거나 말거나 전법으로부터” 늘 속수무책인 우리(76쪽). “말과 행동에 있어 그 보폭을 나란히 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가. 말이 한발 앞서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행동이 한발 앞서면 의뭉스러운 사람이 된다. 나는 여전히 아장아장 그 걸음마가 어렵다.”(214쪽) 김민정 시인의 어릴 적 꿈은 어른, 그러나 어른이 되어 맞닥뜨린 세상은 입이 없는데 떠드는 사람들과 입이 있는데 침묵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벌이는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나도 그들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으니 어쩌랴(296쪽). “그들에게서 나라는 평범을, 나라는 보통을”(56쪽) 발견하게 되는걸. “어른이 된다는 건 매일매일 모르는 일이 훨씬 더 많음을 알게 되는 일이라 두렵기 마련”(325쪽), “자문하다보면 필시 침묵하게도 되는바. 그러니 안다고 믿는 언덕에서 가장 쉽게 미끄러지는 거 아니겠나.”(49쪽) 상식과 정의의 온당함이라는 기본적인 얘기를 어렵사리 토로해야 한다는 씁쓸함(201쪽). 말이 안 되는 말을 놓고 말을 나누려니 슬픔으로 탁해지는 분노(21쪽).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건 귀신일 테니 그건 불가할 테지만 최소한 제 주제파악은 해야 하지 않을까(295쪽). 도통 나도 실천하지 못하는 주제에 “에라, 한 입 갖고 두 말이나 말지!”(25쪽) “그래도 그게 난데, 내 스타일인데 감추고 가식을 떨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23쪽). “힘들다고 말하면 엄살이고 괜찮다고 말하면 체념이 아닐까 싶은 순간에”(12쪽) 겉어림의 말 말고 속사정의 말(69쪽)을 헤아리는 마음. “사랑하다 미워지면 욕을 하고 욕을 하니 미안해져 더더욱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원이 그리는 바로 그 정”(13쪽)이 여기 있다.
장날에 두부 사러 갔다가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며 죽일 년 살릴 년 하는 아주머니들의 뒤엉킴을 보는데 주책맞게 왜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는지. 엎어진 좌판 아래 뭉개진 두부의 흰 살을 다시금 탄탄히 네모나게 살릴 수는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그걸 쓸어담는 아주머니들의 데어 붉어진 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는 거, 그 와중에 콩비지 바가지가 쏟아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했다면 이는 특유의 오지랖이었으려나. 싸움은 그릇 도매점 아저씨랑 길 건너 좀약 좌판 아저씨 사이의 일이라기보다 나란히 옆자리를 차고 앉은 두부장수 아줌마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인 법, 우리 삶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상처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 생살 속속 알아온 피붙이 같은 이들끼리 주고받는 고유의 것이라 할 때 이 모순, 이 아이러니를 나날이 극복하며 새날을 맞이하는 모든 이가 기적의 생환자 아닐까.
_「10월 30일─어찌들 살고 계신지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