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의사의 사랑과 평화 사상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최고의 가치입니다. 2015년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지 105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 의사의 숭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화합과 평화의 길을 열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삼중 스님께서 쓰신 이 책이 안 의사의 뜻을 알리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_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광복 70주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
당신은 안중근을 잊었는가?
2015년은 아주 뜻깊은 해이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105주기가 되는 날이며, 8월 15일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코레아 우라』는 이 의미 있는 해를 맞이하여 기획되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울린 총성.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의 손길을 뻗고 있던 침입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사람은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청년, 안중근이었다. 민선 변호사 선임 불가, 초고속으로 집행된 사형. 이 어처구니없는 재판 과정에 대한민국은 분노했지만, 모든 일본인이 안 의사의 죽음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사형 집행일을 연기해달라고 탄원서를 올린 형무소장, 대를 이어 안 의사의 추모 기도를 올리게 한 담당 간수 등, 안 의사를 만난 일본인들은 그를 향해 깊은 숭모의 마음을 품었다.
이 책은 이 놀라운 한일 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박삼중 스님이 30년 넘게 뒤쫓은 인간 안중근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서른두 살. 오늘날로 보자면 누군가는 취업을 하고, 누군가는 갓 결혼했을 나이이다. 살아온 날보다 더 긴 미래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처자식을 포기하고 이 젊은 나이에 국가의 운명을 등에 업은 이유는 오늘날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당신을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조차 숭모의 마음을 품게 한 영웅 안중근.
대한민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당신은 안중근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이미 이 청년을 잊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완전한 독립과 동양 평화를 이루었는가?
안중근 의사의 뒤를 쫓는 노승
그가 밝히는 인간 안중근
광복 70주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 이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누군가가 안중근 의사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면 단연 박삼중 스님을 꼽아야 한다. ‘사형수들의 대부’라 불리는 박삼중 스님은 안중근 의사 유해 모셔 오기 운동, 안중근 의사 유물 반환 운동에 앞장서며, 안 의사 관련 강연회를 여는 등 삼십여 년간 그의 발자취를 쫓고 있다.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 새로운 정보가 들려오면 기자들마저 박삼중 스님에게 연락을 취할 정도다.
사형수들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일한 박삼중 스님은 우연히 방문한 일본 다이린지(大林寺)에서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발견한다. 안중근 의사 수감 당시 그를 담당한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가 안 의사 사후에 대를 이어 그의 위패를 모시게 한 것이다. 패권주의에 빠져 동아시아를 위협하던 일본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를 쏜 대한민국의 청년 안중근. 서로의 원수이기도 한 지바 도시치와 안 의사의 숨겨진 우정 이야기를 계기로 박삼중 스님은 안중근 의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는 안 의사의 유물을 한국에 들여오기 위해 어디든 다녔고, 일본에서 반환받은 안중근 의사 유묵 ‘경천(敬天)’을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전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염수정 추기경은 기꺼이 이 책의 추천사를 써주었다. 현재까지 염수정 추기경이 추천사를 써준 것은 전무한 일이며, 이로써 ‘안중근’이라는 영웅을 주제로 불교계와 천주교가 화합한 초종교적인 책이 탄생한 것이다.
『코레아 우라』에는 안중근 의사에게 미쳐 삼십여 년을 보낸 박삼중 스님이 조사한 안 의사의 삶과, 스님이 왜 그토록 안 의사의 발자취를 쫓았으며, 오늘날 우리가 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모셔 와야 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종교의 벽을 넘어 많은 사람이 우리의 영원한 영웅 안중근을 기억하게 하는 것, 목숨 바쳐 아시아를 구한 영웅 안중근을 향한 박삼중 스님의 예의이자 그의 마지막 꿈이다.
추천의 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안중근 의사의 평화 사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며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인 1897년, 열아홉 살 청년이 자신의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였습니다. 그는 깊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부님을 도우며 봉사했고, 사람들에게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한 집안 가운데는 그 집 주인이 있고, 한 나라에는 임금이 있듯이, 이 천지 위에는 천주님이 계십니다. 천주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삼위일체의 지위와 품격을 가지신 분입니다”라는 말을 전하며 열심히 전교했습니다. 그때까지 이 청년이 바라던 것은 단지 천주님을 믿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청년이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왜 그 사람에게 총을 쏘았느냐는 검사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쏘았소.”
열아홉 살의 토마스는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에게는 정의를 실천하였다는 종교적 신념이 있었기에, 사형이 집행되는 그곳에서도 누구보다 담대하고 초연했습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의병군을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중에도 생포한 일본군들을 그대로 살려 보내 자신이 가진 평화 사상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박삼중 스님은 이런 안중근 의사의 평화 사상에 감명을 받아 삼십여 년 가까이 안 의사의 발자취를 쫓으셨습니다. 안 의사가 순국하신 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분의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안타까워하시며 여러 차례 중국 뤼순旅順을 방문하셨습니다. 또한 일본과 중국에 흩어져 있는 안 의사의 유묵들을 찾아 이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어렵게 구해 온 안 의사의 마지막 유묵 ‘경천敬天’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소장할 수 있도록 애써주셨습니다.
안 의사의 평화주의는 어느 한 사람 혼자서 이루어낼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되고, 우리와 너희가 또다시 큰 차원의 우리가 되어 만들어가는 범우주적 가치입니다. ‘내 이익과 영달을 위하여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안 의사의 사랑과 평화 사상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안 의사가 이야기하는 평화란 ‘나와 우리, 우리나라’에만 국한되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와 이웃 나라의 평화,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경천’ 사상입니다.
2015년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지 105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 의사의 숭고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화합과 평화의 길을 열어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박삼중 스님께서 쓰신 이 책이 안 의사의 뜻을 알리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박삼중 스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이 책이 출간될 수 있도록 힘써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염수정 안드레아
책속으로 추가
*의장대 사이에서 권총을 뽑아 들고 이토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소리가 군악대의 연주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가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휘청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순간 ‘저 늙은이가 이토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로 의심되는 남자 주변의 네 사람에게 각각 한 방씩 총을 쏘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무죄한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에 총을 쏘는 손이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에 순식간에 헌병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 “이토를 죽인다고 동양의 평화가 회복될 거라고 생각하오?”
나는 말했다.
“이토가 많은 전쟁을 일으켜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것은 맞지만 이토가 죽는다고 당장 달라지진 않겠지요. 그러나 일본과 이토가 저지른 짓이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짓이었다는 사실은 세계에 알려질 것이오. 게다가 한국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국권을 내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릴 수 있었으니 국제적으로 비난을 피해 갈 순 없지 않겠소?”
“사실 오늘 일본에서는 이토 장례식이 있소. 일본 최초로 국장으로 치러질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대체 당신이 생각하는 동양의 평화는 무엇이오?”
“내가 당신을 때리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를 때리지 말라는 것이오. 힘의 논리로 힘센 나라가 자신들보다 약한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는 것을 당연시한다면 일본 역시 다른 힘 있는 나라에게 한국과 같은 비극을 겪게 될 것이오. 개인이든 국가이든 자신들이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은 다른 나라에도 하지 않으면 되오. 내가 생각하는 평화란 그뿐이오.”
*뤼순에서 온종일 열차를 타고 하얼빈의 일본영사관까지 와서 첫 심문을 했던 미조부치는 형무소 안에서 이루어진 심문에서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퍽 친절했다. 심문하는 동안에도 과격한 용어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과 이토가 동양에서 저지른 죄악에 대해 한결같은 대답을 했지만 한 번도 거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미조부치는 내가 한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의로운 일을 한 거라고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정식 심문이 끝난 뒤에도 금방 돌아가지 않고 나와 시간을 보내다 돌아갔다. 그는 늘 이집트 담배를 피웠는데 심문 후에는 내게도 권하여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토론하곤 했다. 그는 내가 한국인으로서의 복수심이 아닌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그런데 심문이 거듭되면서 미조부치의 태도가 달라져갔다. 심문을 하는 내내 나한테 사형이 내려지지 않을 거라는 전제하에서 질문을 던지던 미조부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한 일이 ‘사형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논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미조부치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일본 정부에서 그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재판정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빈자리 없이 가득 찼다.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하다 못해 숙연하기까지 했다. 마나베 판사의 판결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안중근은 사형, 우덕순은 3년 징역,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1년 반 징역에 처한다.”
검사의 구형과 같은 형량이었다.
나는 판사석을 향하여 이렇게 물었다.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
판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소 일자를 5일 이내에 다시 정하겠다고 말하고서 서둘러 공판을 끝내버렸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일본인들이 환호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이토 만세”, “대일본제국이여 영원하라” 하면서 판결을 자축했다. 그러자 다른 한쪽에서 한국어로 “닥치지 못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사와 판사, 관선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다 나가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남아서 나를 보려고 기웃거렸다. 그때 지바 도시치와 헌병들이 들어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갔다.
지바 도시치는 마차를 몰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연신 이 말만 반복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마치 한국의 여론이 합방을 원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의사의 거사로 자신들의 거짓말이 드러나고 국제적으로 비난 여론이 일자 어떻게든 이 사건을 서둘러 종결시키려고 했다. 자기 몸을 던져 이토를 죽임으로써 일본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자 한 안 의사의 저격 의도가 심문 과정에서 밝혀지면서 그 사실이 속속 세계 언론에 기사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기적인 이 재판의 승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월계관을 거머쥐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나갔다. 그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
-영국 신문 「더 그래픽The Graphic」
중국 내의 언론사들도 일제히 경축 기사를 내보냈다.
한국의 원수는 우리에게도 원수이다. 한국 사람이 자기네 나라 원수를 갚았다고 하지만 우리의 원수도 갚은 것 아니겠는가?
-중국 신문 「민우일보民?日報」
*이 사실을 안중근 의사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사이엔 사람들이 짐작하는 이상의 교감이 오갔던 것 같다.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 쓰다 가이준의 관계가 우정에 가까웠다면 구리하라는 후원자에 가까웠다. 형무소장이라는 직함을 최대한 내세워 안중근을 도우려 했기 때문이다. 구리하라의 이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안중근이다.
안 의사의 유묵 ‘경천’은 그 즈음에 구리하라에게 준 것이다. ‘경천’이라는 글자를 쓴 건 구리하라가 원해서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안중근 의사가 직접 고른 단어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하늘을 우러러’라는 의미의 ‘경천’을 써서 형무소장에게 주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4년 8월 4일에 기증식이 있었다. 기증식을 마치고 ‘경천’을 구입한 잠원동성당의 김종박 사목회장, 서울대교구의 염수정 추기경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경천’을 앞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경천’을 한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숱하게 일본을 오가며 골동품상을 설득했던 일들이 떠오르며 감개가 무량했다.
가톨릭 신자인 안 의사가 글씨를 쓰고, 형무소장과 그 가족이 긴 세월 동안 고이 간직하고, 사형수들의 대부라 불리는 스님이 한국으로 들여오고, 성당에서 그것을 구입해 천주교 대교구에 기증하기까지 꼬박 100년이 걸린 것이다. 하늘의 뜻인 듯해 이 모든 과정 앞에서 숙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