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오래된 책들의 지혜와 가르침!
이 책은 일종의 ‘독서론’을 다룬 책이다. 하지만 흔한 독서법 관련 자기계발서처럼 독자들에게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개인적/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끊임없이 고민해 보아야 할 열여덟 가지 논제들에 대해 과거의 책들과 앞서 살다간 현자(賢者)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것을 단순히 나열하듯 보여주지는 않는다. 서로 다른 장소와 시대에 쓰이고 살았던 책들과 현자들이 각각의 논제를 두고 마치 한곳에서 논쟁하고 동조해가며 치열하게 담론을 나누듯 구성되어 있다. 때로는 독자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한다. 오늘을 사는 당신은 그런 논제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고. 이런 흐름을 통해 이 책은 왜 과거의 논제들이 오늘날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왜 그것들을 배우고 고민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의 촉수를 건드려 더 많은 책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독서의 질과 양을 늘리도록 독려하고 있다.
오래된 책은 세상과 사회를 보는 창(窓)이자,
옳고 그름과 진리를 깨우쳐 주는 스승(師)이며,
철학을 나누며 먼 길을 함께 가는 벗(友)이다.
부쩍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돌고 있다. 나라가 위기다, 경제가 위기다, 인간성이 위기다 등등. 한마디로 나라 안팎 모든 것이 위험에 처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태평시대로 불리던 과거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 어느 한때 나라가, 경제가, 인간성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오늘날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공자는 혼란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시대에 살았다. 당시 대중들은 ‘먹고, 입고, 자는’ 데에도 급급한 처지였다. 거칠게 표현하면 짐승과 별반 차이 없는 삶을 산 것이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이 ‘예(禮)’이고 ‘도(道)’였다. 인간성과 도덕이 무너진 상황일수록 ‘인간으로서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상황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과거 수많은 현자(賢者)들의 깨우침이고, 그들이 남겨준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 시대에 되새겨야 할 ‘기본’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삶의 기본이 되는 소통, 인간관계, 리더의 본질 등을, 개인적 삶의 기본이 되는 삶과 죽음, 행복, 심리학 등을, 또 다른 사람과의 지적 대화를 나누는 데 기본이 되는 문명, 고전, 경제적 개념과 이론, 깨달음, 법(法)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 담긴 열여덟 가지 주제들은 특별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책을 읽는 목적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 지혜롭게 관계를 맺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내 삶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 주제들은 절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 책에 녹아 있는 오래된 책들의 생각을 멘토 삼아 그 각각의 분리된 주제들을 ‘내 삶을 위한 든든한 토대’로서 연결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오래된 책 속에 부를 얻는 방법,
스스로 귀해지고 현명해지는 방법이 들어 있다
과거는 현재와 맞닿아 있다. 또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는 생각과 행동이 미래의 모습을 결정하는 단초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에서 오늘을 배워야 한다. 다만 저자는 현재 우리가 상식으로서 알고 있는 지식보다 더 깊은 본질을 담고 있는 지혜를 얻으려면 계속해서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기회비용과 암묵지/형식지 등의 지식 개념이 비록 서양에서 발생했지만, 동양의 현자들은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이미 훨씬 더 오래전에 지식이 아닌 지혜로서 그와 똑같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그 시대로 돌아가 살아보거나 현자들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것은 바로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오래된 책들뿐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의도에서 많은 책들 속에 숨겨진 지혜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지난한 작업을 통해 이 책을 완성했다.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수많은 정보를 빠르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이때에 어쩌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오히려 경쟁에서 멀어지는 한가한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부와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책 읽기를 권하고, 그들 스스로 많은 책을 읽은 까닭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음 왕안석의 시구처럼 책 속에 부를 얻는 방법, 스스로 귀해지고 현명해지는 방법, 이익을 얻는 방법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자는 책으로서 부유해지고(貧者因書富)
부유한 자는 책으로서 귀해진다(富者因書貴)
어리석은 자는 책으로서 현명해지고(愚者得書賢)
현명한 자는 책으로서 이익을 얻는다(賢者因書利)
이 책이 독자들이 좋은 책을 찾아 나서는 데, 좋은 책을 만나는 데 그리고 좋은 책을 마음에 새기는 데 디딤돌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Book Review
◈ 지은이_ 신동기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 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기업, 대학교 MBA/최고경영자 과정, 정부기관 및 방송 인문학 프로그램 등에서 인문학 및 인문학&경영학 융합 내용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경제연구원이 ‘휴가철 CEO 가 읽어야 할 도서(2015년)’로 선정한 《네 글자의 힘》을 비롯해 《아주 낯익은 지식들로 시작하는 인문학 공부》, 《회사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는 인문학적 생각들》, 《생각여행》, 《인문경영으로 리드하라》, 《인문학으로 스펙하라》, 《독서의 이유》, 《해피노믹스》, 《직장인이여 나 자신에게 열광하라》 등이 있다.
인용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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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으로
리더와 구성원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당연히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있다. 이때 그 원인과 결과는 상당히 닮아 있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은 리더가 자질상 의사소통을 위한 지적 능력·기술을 비롯한 조직경영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그 리더를 직접 보좌하고 있는 무리들(예를 들어 환관)이 리더와 구성원들 사이에 견고한 불통의 장막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리더의 자질과 최측근의 리더에 대한 접근 차단이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하는 주요 원인이다. 이로 인해 리더와 구성원 간에 올바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리더의 의사결정 능력은 현저히 퇴화되고, 최측근의 월권적 활동은 장마 때의 곰팡이처럼 왕성해진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현장감각을 갖출 수가 없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자연스레 리더의 생각이나 판단이 최측근의 의견에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된다.
문제는 일반 조직이든 국가 조직이든 리더의 최측근(과거의 환관, 지금은 리더의 신상과 일상을 챙기는 수행비서 등)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선출된 권력이거나 공식적으로 검증된, 즉 공식적으로 책임이 부여된 적도 부여할 수도 없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리더의 최측근이라는 사람들의 역할은 리더의 업무적 의사결정을 돕는 것이 아니라, 주로 리더의 일상사를 챙기는 것이다. 따라서 리더가 의사결정에 있어 이런 최측근의 의견에 영향을 받게 되면, 그것은 바로 최측근이 ‘공식적인 책임이나 능력’ 없이 ‘비공식적인 권한과 영향력’만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550년의 지난한 성업에 의해 들어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 왕조를 14년의 역사로 허무하게 끝나게 한 환관 조고(趙高)나, 420년 역사의 한(漢) 왕조의 멸망을 재촉한 십상시(十常侍)와 같은 존재가 바로 그런 최측근들이다. 리더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리더의 조직경영 능력 약화와 최측근의 발호, 나아가 국가 멸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1장 리더의 본질_ 리더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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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사람을 쉽게 믿는 것은 경박스러움의 표시’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친근함을 나타내고 듣기 좋은 소리를 할 때, 그런 행위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책임이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나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기 때문에, 즉 경박하기 때문에 그런 말과 행동을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다. 공자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군자는 사람이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그를 등용치 않고, 사람이 바르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말을 모두 버리지 않는다.’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맹자》에서의 ‘지언(知言)’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다.
‘마음을 다해 사람의 본성을 파악하고, 이 세상 모든 말들에 대해 그 이치를 따져보고 지극히 함으로써 시비득실의 까닭을 알지 못함이 없게 한다.’
《성경》이 상대의 가벼운 행동과 교언영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박을 탓하고 있다면, 공자는 받아주는 이의 합리적·이성적 판단과 함께 공리주의(功利主義)적 행동까지도 강조하고 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도 말고, 또 그 사람의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한 선입견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2장 인간관계_ 쉽게 다가오는 사람은 그 떠남도 쉽다> 중에서
쾌락 추구는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양주는 쾌락의 의미와 방법론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그 바탕이 되는 이기주의를 날카롭게 정의했다. 이것이 바로 다음 말로 대변되는 그의 ‘위아설(爲我說)’ 또는 ‘귀기론(貴己論)’이다.
‘(자신의) 털 하나를 뽑으면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해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인간의 이기주의에 근거하여 자신의 모든 주장을 전개한 A. 스미스와, 공리주의자로 평가받는 경험론 철학자 D. 흄이 각각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은, 이기주의에 대한 양주의 날카로운 정의가 결코 지나친 억측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아담 스미스 :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 데이비드 흄 :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이 전부 파멸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아예 물질적, 육체적 쾌락은 피하고 정신적 쾌락에 치중하라고 말했다. 반면에 양주는 물질적, 육체적 쾌락의 생애 총량이 최대가 될 수 있도록 고통과 쾌락을 현명하게 안배하라고 강조했다. 한쪽은 물질과 육체를 아예 배제하고, 다른 한쪽은 여전히 물질과 육체에 머무르고 있다는 차이가 있지만, 양쪽 모두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쾌락을 추구한 이성 행복론이었다.
<6장 행복_ 지금 우리에게는 아타락시아가 필요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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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近思)’는 다름 아닌 ‘실용성’을 의미한다. 자하도 《논어》에서 그런 의미로 말했고, 주희와 여조겸도 그들이 공저한 책을 《근사록》으로 이름 지은 이유가 ‘공허함’을 부정하고 ‘실리’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라고 밝히고 있다. 《논어》와 《맹자》의 궁극적인 공부방식 또는 공부목적이 경전의 자구 하나하나의 뜻풀이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는 훈고학일 수는 없다. 더욱이 오늘날 인간평등시대에 공자의 이름을 피휘(避諱, 성인 등을 높이 받들어 그 이름자를 발음하지 않는 등 사용하지 않는 것)하는 것과 같은, 공자를 신처럼 숭배하기 위한 것일 수는 없다.
‘나는 나면서부터 잘 아는 자가 아니다. 옛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이다.’
공자 스스로 이렇게 말한 것처럼, 공자는 사람 위의 사람이 아니다. 즉, 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절대자인 신처럼 공자를 떠받든다면 그것은 공자의 인간적 노력인 ‘敏而求之者(민이구지자,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자)’를 오히려 평가에서 제외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결함 있는 보통의 한 인간이 평생 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 신에 버금갈 정도로 자신을 향상시킨 그 위대한 노력을 아예 외면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공자나 맹자가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 전제는 그들이 신이 아닌 ‘인간’이고, 그 존중과 존경의 대상은 그런 훌륭한 인격과 소양을 갖추기까지 기울인,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인간으로서의 ‘각고의 노력’이어야 한다. 그것이 신이 아닌 인간인 공자와 맹자에 대한 정당한 대우이고 이성적 존중이다.
<13장 실용_ 시대를 대표하는 학문은 모두 실용을 지향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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