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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작품 소개

<유산> 경부선 아침 열차가 부평평야의 안개를 가슴으로 헤치고 영등포역에 닿을 때다. 경숙(敬淑)이는 아직도 슬슬 구르는 차바퀴 소리를 들으면서 차창을 열고 윗몸이 차 밑으로 쏠릴 것같이 내놓고 플랫폼 위를 일일이 점검하려는 것같이 살폈다. 그러나 영등포 역까지쯤이야 맞아줌 직한 기호(基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을 떠날 때에 전보로 통지를 하였었다. 만일 그 전보를 받아보고도 맞아주지 않았다면, 경숙이 금번 경성 오는 것이 근본적으로 틀린 생각에서 나온 일이었다. 응당 맞으러 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것만큼 실망도 컸다.
그의 안색은 비가 쏟아질 듯한 가을 하늘 빛같이 변하고 말았다.
‘본래부터 여자에게 달게 굴 줄이란 바늘끝만치도 모르는 그 사람이지만, 오늘 내가 경성을 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은가.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까?’
이러한 생각은 경숙이가 기호에게 아직도 호의를 가지고 양해하는 원망이었지만, 생각이 생각을 팔수록 기호와 자기 사이에 불길한 광경이 생길 듯한 예감이 커졌다.
경성에는 다시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다시피 한 지 반년이 못 되어 다시금 올라오는 것도 물론 부끄러운 일이지만, 편지로서 그만큼 양해를 청하고, 또 일평생에 큰 관계를 가지게 할 이번 길인 것도 모르는 체하고, 기호가 한 발도 내놓지 않은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었다. 자기의 진퇴유곡인 오늘 형편을 조그만치라도 이해하고 동정한다면, 전보로 맞아달라는 그만한 부탁을 이렇게 잘라먹을 리는 만무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의 섭섭한 생각은 다시 원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자기 자신이 몹시도 불쌍한 생각이 새로웠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한 형편에는 그래도 행여나 기호가 이곳까지 맞으러 와서 자기를 찾으러 이 차 칸, 저 차 칸으로 헤매고 다니지나 않는가 하여 차 안을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니 온 기호의 얼굴이 경숙의 눈에 뜨일 리가 만무하였다. 그는 실망만 잔뜩 안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몸을 던지듯 펄썩 주저앉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아마 경성 역에는 나와 있겠지. 용산까지나 왔을까…….’
이렇게 생각을 돌이키고 그는 눈물을 닦았다.
기차는 어느덧 노량진을 지나 한강철교로 들어섰다. 경숙이는 요란하게 구르는 차륜(車輪)소리와 아울러 자기의 깊은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고동을 들었다. 밤이 새도록 놀지도 못하고 하편 구석에 단단히 뭉쳤던 태아도 이제야 서울에 당도하였다고 기뻐하는 것같이 힘 있게 배를 치받고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경숙이는 이제야 비로소 이러다가 유산이나 되지 않을까 하던 근심을 놓았다. 그러나 뱃속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뛰노는 새로운 생명의 더욱 불쌍한 생각이 또 하나 불었다. 그는 치맛귀로 손을 넣어 아랫배를 슬그머니 누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 새로 나올 생명은 그의 심장의 고동을 통하여 그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듣기만 하여도 몸서리가 날 저주를 받아왔었다.
경숙이는 자기 몸에 이상한 기미가 생기고, 그 이상한 기미는 의심없는 잉태인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는 이 새로운 존재를 몹시도 저주하였다. 물론 처녀로 잉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자기가 한번 저지른 일이니 그의 보복으로 몹쓸 운명 아래 그대로 엎드려 지낼 생각은 없었다. 그는 여자 사회에서 지금까지 쌓아놓은 지위가 이 생명 때문에 일조에 무너지고 말 것을 생각할 때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기호와 어울리어 지낼 때에는 결과가 여기까지 이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자로서 전문 정도의 학교를 마쳤다는 것이 조선 여자 사회에서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경숙이가 얼굴이 어여쁘고, 연단에 나서면 말을 잘하고 목청이 좋아서 음악을 잘하고, 또한 남성에 대한 교제가 능란하다는, 여자로서 가지기 어려운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하였다는 바람에 정신 차리지 못한 여러 남자들은 경숙에게 호기심을 두고 덤비었던 것이다.


<저자 소개>
유산(流産)
판권


저자 소개

1895년 5월 12일 ~ 1935년 4월 19일.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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