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가 왕이 되면 이 미친 나라가 바뀔 수 있는 거요?”
“바뀝니다. 아니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삼봉 정도전의 정신과 육체, 설령 목숨을 내놓더라도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왕으로 태어나 신으로 죽은 사나이 정도전!
“민본의 나라란 대체 뭐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왕의 명 아래 모든 게 이뤄지지 않고 신하가 왕을 견제하며 조화를 이루는 나라. 그것이 소신이 꿈꾸는 진정한 민본의 나라입니다.”
그가 무너트린 나라, 고려.
그가 설계한 나라, 조선.
정도전은 두 왕조 어느 곳에서도 결코 자유롭지 못했고 환영 받지 못했다. 그는 고려도, 조선도 그 어느 나라의 백성도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도 그가 있을 곳은 존재 하지 않았다. 삼봉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포은 정몽주가 최후의 고려인이라면 삼봉 정도전은 최초의 조선인이다. 하륜이 따뜻한 온실에서 자란 난초라면 정도전은 차디 찬 북풍을 맞으며 피워낸 한 송이의 꽃이 될 것이고 이방원이 역사가 적은 승리자라면 정도전은 역사가 남긴 패배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타고난 혁명가 정도전은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하륜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남자 정도전, 지금부터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여말선초의 파란만장하고 질풍노도 같은 시대상을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정통사극을 통해 현대의미로 다시 풀어본다.
혁신가로서 정도전이 꿈꾸던 포부와 그가 꿈꾸는 이상향의 나라,
그는 이 나라,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인이자 혁명가로 다시 평가되고 있다.
[본문]
그는 정도전이 함주 군막으로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이인임을 몰아낸 것부터 남은을 위화도로 보내 자신에게 회군을 설득했던 일까지 그동안의 추억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이어졌다.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성계였다.
“만약 내가 왕이 되면 이 미친 나라가 바뀔 수 있는 거요?”
“바뀝니다. 아니 바꾸고야 말 것입니다. 삼봉 정도전의 정신과 육체, 설령 목숨을 내놓더라도 반드시 이뤄내겠습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이 어쩌면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그는 생각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
“나 이성계는 오늘 이 시간 부로 삼봉 정도전의 주군이 되겠소이다.”
*
“포은, 잘 지내셨는가. 내 너무 늦게 자네를 찾아 왔으이.”
정도전이 무덤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가 술병을 따 두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난 가끔씩 꿈을 꾸네. 눈을 감으면 옛 우리 선조들의 광활한 영토가 선하게 보이고 그 영토 위를 힘차게 내달리는 우리 군사들의 함성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네. 튼실한 국방에 마음 놓고 농사를 짓는 백성들은 미신이나 술법 따위에 의지 하지 않고 신나게 노동요를 부르며 삶의 즐거움을 느끼더군. 난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네. 비록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조선이 이어 받을 것일세. 그러니 이제 나를 용서 해주겠는가?”
그러나 무덤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땀을 식혀줄 뿐이었다. 정도전은 묘비 위에 놓인 술잔과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권세를 업었다 하여 결코 거만해지거나 초심을 잃지 않겠네.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더욱 낮게 세상을 바라 볼 것이야. 자네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일세.”
그리고 잔을 말끔히 비운 뒤 무릎에 팔을 걸친 채 허탈한 듯 무덤 주위를 돌아보았다.
“반드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민본의 대업을 실현시킬 것이네. 믿어주게. 포은…….”
*
“방원아…….”
정도전은 자신의 목숨이 죽음에 임박했다는 것보다 민본의 대업이 이대로 끝이 난다는 사실에 온 몸의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죽는다면 민본의 불씨는 영영 꺼져버릴 것이다. 저 광활한 요동 벌판 역시 다시는 되찾지 못할 것이고 조선은 명나라에 굽실 거리는 나약한 자소국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참으로 두려웠다.
“솔직히 삼봉이라는 거목을 쓰러트리려면 얼마나 많은 피 바람이 필요한지 감도 잡히지 않았는데 이거 천하의 봉화백도 이렇게 역풍 한 방에 무너지는구려.”
*
“결국 자네는 정안군을 택하였구만, 호정.”
군사들에 의해 억지로 무릎이 꿇린 정도전이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하륜은 조금은 씁쓸한 듯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역사를 쓰는 건 승자이니까요.”
말을 마친 하륜이 뒤로 물러나자 이방원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방원은 닦지도 않은 칼을 정도전의 목에 가져다 대며 칼날을 비틀었다. 차가운 쇠의 촉감이 먼저 느껴졌고 그 다음 얼마나 살육 당했을지 모를 수많은 이들의 식지 않은 피가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