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읽게 된 핑크의 설교 말씀은,
내게 “번쩍이는 빛처럼” 크나큰 도움을 주었다! _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숨은 보석’이자, 평생을 성경연구에 바친 위대한 성경학자 아더 핑크의 전기이다. 핑크가 1922년부터 발간한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는 영어권 그리스도인들이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저작들이 재발행되면서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은 이안 머레이가 1981년에 출간한 초판에 새롭게 발견한 핑크의 원고와 그 밖의 자료를 반영한 개정증보판으로, 강인하면서도 복합적인 인물, “진리의 용사”이면서 겸손한 그리스도인이었던 한 인물의 흥미로운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더 핑크의 생애뿐 아니라 동시대의 사상과 상황들이 역동적으로 펼쳐져 있어, 한결 흥미로운 핑크의 전기로 인정받고 있다.
[특징]
- 아더 핑크의 삶, 신앙, 신학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다.
- 아더 핑크의 생애과 활동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 연보 수록
-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2권
* 복 있는 사람에서 펴낸 「하나님의 사람」 시리즈
1 「전능자의 그늘」 _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 짐 엘리엇의 삶과 신앙
2 「영광의 문」 _북미 선교사들의 영원한 심장, 젊은 5인의 순교 이야기
3 「에이미 카마이클」 _하나님의 거룩한 전사
4 「디트리히 본회퍼」 _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생생하게 그려낸 본회퍼 전기의 결정판
5 「순례자의 노래」 _위대한 복음전도자, 스탠리 존스의 영적 자서전
6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_원본에 충실한 국내 최초 완역본
7 「프랜시스 쉐퍼」 _20세기 기독교 문화 형성의 가장 중요한 인물
8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 _새롭게 쓰여진, 조지 마즈던의 조나단 에드워즈 전기
9 「고백」 _가난한 자들의 친구, 도로시 데이의 영적 순례기
10 「아직 끝나지 않은 길」 _위대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 자서전
11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_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와 그의 시대
[독자 대상]
- 아더 핑크의 삶과 사상을 깊이 이해하고픈 독자
- 진리를 품은 한 인물이 어떻게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인물로 변화되어 가는지를 알고 싶은 그리스도인
- 신학자와 더불어 말씀을 선포하고 전하는 목회자, 신학생, 선교단체 간사
[아더 핑크(Arthur W. Pink, 1886-1952) 연보]
1886년 4월 1일 | 잉글랜드 중부의 노팅엄에서, 자영업자이던 아버지 토머스 클레멘트 핑크와 벨퍼 출신 어머니 아그네스 헌트의 장남으로 태어나다. (핑크는 독실한 신앙을 가진 부모로부터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녔다.)
1902년 | 어린 나이에 ‘청소년 사업가’로 자리를 잡다.
1908년 | 22세에 자신의 침실에서 온전한 회심을 경험하다. (당시 사이비 종파인 신지학회에 깊이 빠졌던 그를 돌이킨 것은, 아버지가 전해 준 잠언 14:12 말씀이었다.)
1910년 6월 | 영국을 떠나 미국 시카고에 있는 2년 과정의 무디 성경학교에 들어가다. 6주가 지난 후, 성경학교를 떠나 목회를 시작할 것을 결심하다.
1910년 8월 | 콜로라도 주 실버턴의 회중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다.
1913년 | 캘리포니아(두 번째 목회지로 추정)에서 영국으로 돌아와 18개월간 머무르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 전쟁이 일으킨 모든 흥분을 목도하게 된다.)
1915년 | 미국 켄터키 주 버케스빌과 올버니에서 1년간 목회하다.
1916년 | 30세의 늦은 나이에 켄터키 출신의 베라 러셀과 결혼하다. 켄터키 주 스코츠빌에서 목회하다.
1917-1920년 |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의 노스사이드 침례교회에서 목회하다.
1918년 |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 출간되다. (이 무렵, 핑크는 점점 더 청교도 고전을 탐독하게 된다.)
1920-1921년 | 미국 동부의 여러 주와 서부의 캘리포니아 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설교와 성경연구를 병행하는 ‘순회 설교자’로 활동하다.
1922년 | 사설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를 발행하기 시작하다. (영어권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배부된 이 잡지를 통해 독자들은 스펄전 시대 이래 거의 들을 수 없었던 복음을 깨닫게 된다.)
1925년 3월 | 호주 시드니로 이동하여 여러 집회와 함께 시드니 벨브와 가 교회와 독립교회에서 3년간 목회하다.
1928년 7월 | 영국으로 돌아와 8개월 동안 머물며 설교자로 일하기를 바랐으나 자리를 얻지 못하다. (이후 1936년까지 핑크 부부는 열두 번이나 거처를 옮기며 살아야 했다.)
1929-1930년 | 켄터키 주 모턴스 갭, 캘리포니아 주 글렌데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지내다. “우리는 1930년 한 해 동안 어느 교회에도 속해 있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을 점점 더 보기가 어려웠다.”
1931-1934년 | 동부 펜실베이니아로 근거지를 옮겨 연구하고 집필하다. (이때는 미국이 경제 대공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였다.)
1934년 9월 | 영국으로 귀국하여 첼트넘, 글래스고, 호브에 정착하여 책을 집필하고 「성경연구」를 발행하는 일에 몰두하다. “마침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는 모든 희망과 노력을 단념하고, 모든 공중 활동에서 물러났습니다. 이제 나는 잡지 발행이라는 이 행복한 사역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편지 왕래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려고 합니다.”
1940년 11월 |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안전하고 조용한 사역을 위해 영국 북서부 루이스 섬의 스토너웨이로 이사하다.
1952년 7월 15일 | “성경이 스스로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구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66세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순례 여행’을 마감하다. (그는 자신의 묘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겨 스토너웨이 샌드위크 묘지에 묘비 없이 묻힌다.)
핑크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그의 저작들을 여러 출판사에서 재발행하게 되고, 그 결과 아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더글라스 존슨을 포함하여 교리적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주도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핑크는, “사후에 그의 저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20세기 후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