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사를 딛고 새 역사를 창조하자”
5천 년 잠자던 민족혼을 일깨우다
영인 우리 민족의 나갈 길(附 지도자道) (박정희 전집 2)
우리가 사는 ‘박정희가 만들고 싶었던 세상’
1961년. ‘지금부터 55년 전’이라고 거꾸로 말고, 시간순으로 보자. 오랜 전제정치에 이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지 16년, 단군 이래 처음 민주선거를 하고 나라를 세운 지 13년, 전쟁 끝난 지 겨우 8년이다. 한 해 전 혁명이 있었고, 방금 또 군사혁명이 있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라지만 민주가 뭔지 제대로 알 겨를이 아직 없었고, 현실의 민주는 지긋지긋하기조차 했다. 희망 없는 민족, 미래 없는 나라였다. 5.16 당일과 이튿날, 교수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고 나중에 ‘반(反) 독재 민주화투쟁’의 아이콘이 되는 인사들(함석헌, 장준하 등)조차 두 손 들어 군사혁명을 반긴 이유다.
5.16혁명 이듬해 펴낸 박정희의 <우리 민족의 나갈 길>(초판 1962)은 세로짜기, 국한문혼용이다. 아직 정치인이 아니고 ‘임시 관리자’를 자처하던 박정희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여 주는 총 277쪽의 묵직한 책이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 책을 원본 그대로 영인해 펴낸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박정희가 청년 시절부터 꿈꿔 왔고, 혁명을 계기로 이제부터 만들고 싶어 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철저히 ‘교사, 군인, 혁명가’의 스탠스에 이제 막 ‘경영자’의 시야를 장착한 때였음을 명심하자. ‘나’ 또는 ‘본인’은 철저히 뒤로 숨고, 시종일관 앞세우는 것은 ‘우리=겨레=나라’다. 과거의 우리를 자성(自省)하고 현재의 우리를 염려하고 미래의 우리의 청사진을 내놓는 구조다.
과거와 현재 돌아보기는 통렬하기를 넘어 자조(自嘲)적일 만큼 신랄하다. 그사이 역사학의 새로운 해석과 의미부여도 꾸준히 있어 왔다. 55년 전 글이라는 것, ‘민족적 각성’을 아예 ‘인간 개조’라는 강한 필치로 촉구하는 충격요법 목적의 글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간, ‘우리나라가 이다지도 망할 나라였던가!’ 하는 반감 가까운 한탄이 절로 나올 만하다. 그런가 하면, 장밋빛 일색의 대한민국 미래 청사진은 당시로서는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받아들여졌을까? 북한보다도 못살던 아시아 최빈국이자 후진 민주주의 국가가 ‘복지사회’는 또 무엇이며 심지어 ‘나면서부터 무덤까지’(영인 264쪽, 평설 194쪽)라니! 그런데 지금의 관점으로 찬찬히 보면 그 울림이 얼마나 새록새록 가슴을 파고드는가?
아무도 꿈꿀 엄두조차 못 낸 꿈을 반세기 앞질러 꾼 박정희. 그가 꿈꾼 바로 그런 나라를 지금 사는 우리가 다시 이 책을 돌아봐야 할 이유다.
세로쓰기와 한자 노출이 낯선 1970년대 이후 출생 세대를 위해, 책을 현대어로 풀어 쓰고 간추린 가로쓰기 <평설 우리 민족의 나갈 길>(남정욱 풀어씀, 박정희 전집 6, 기파랑 刊)을 동시출간했다.
<지도자도(指導者道)>(부제 ‘혁명과정에 처하여’)는 5.16 한 달 뒤인 6월 16일 펴낸, 본문 27쪽(총 36쪽)짜리 소책자이다. 이 해 신문지상에 발표한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국민의 길’, 그리고 ‘국가재건최고회의 1962년 시정방침’과 한데 엮어 이듬해인 1962년 초 <지도자의 길, 국민의 길>(공보부 刊)이라는 가로짜기 합본으로 재출간됐으나, 1962년 판본은 풀어쓰기를 넘어 아주 새로 쓰다시피 한 해설판이어서 원본의 모습은 더 이상 없다. 그 원본을 권말에 영인으로 함께 수록했다.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한 지도자
고대국가 성립 이래 이 나라는 전제군주정이었다. 전제정 만도 못한 일제의 식민통치를 35년 가까이 겪고, 역시 외국의 군정을 거쳐 1948년, 단군 이래 처음으로 남녀노소 1인 1표로 ‘국민 대표’라는 것을 뽑고(제헌의회), 거기서 대통령(왕이 아니고!)을 뽑았다(대한민국 정부수립, 1948). 2년도 못 돼 전쟁이 일어나 3년을 끌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전후복구와 개발을 이끌어 가던 정부는 불통을 조장해 사익을 챙기는 무리들로 썩어 들어갔다. ‘못살겠다, 갈아 보자’던 외침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는 실현되지 못하고, 4년 뒤에야 학생과 지식인들이 앞장서 정권교체를 성사시켰다(4.19). 그렇게 구성된 정부가 ‘갈아 봤자 별수 없’더라는 좌절감이 팽배할 때, 다시 1년 만에 군인들이 일어나 무능한 정부를 몰아냈다면?
자, 그때의 눈으로 보자. 단군 이래 최초의 민주공화국 경험 겨우 13년, 겨레와 나라가 아직 동일시되고, 지배층이 무능하고 부패하기는 반세기 전이나 다름없던 그때를 살던 사람들에게, 이 나라 이 겨레는 가망이 있었을까? 5.16 당일과 이튿날, 교수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고 나중에 ‘반(反) 독재 민주화투쟁’의 아이콘이 되는 인사들(함석헌, 장준하 등)조차 두 손 들어 군사혁명을 반긴 이유다.
박정희가 18년 통치기간 동안 줄곧 부여잡은 화두(話頭)인 ‘한국적 민주주의’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바로 이때다. 그 본고장인 서구의 민주주의는 그가 보기에, 오랜 세월 일군 토양에 ‘피’라는 거름을 뿌려 키운 나무다. 해방이 그러했든 민주주의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이나 다름없던 이 나라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따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나 다름없는 ‘후진(後進) 민주주의’였다. 그러나 교사 출신에 군인으로서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덕에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정신만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전쟁과 혼란에서 막 벗어난 혁명 2년차, 이때 단계에서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한 한국적 민주주의를 그는 ‘행정적 민주주의’라 명명했다(제5장 3절). 지금 눈으로 보면 절차적 민주주의, 복지민주주의쯤 된다. 과거사를 통렬히 반성하면서도 향약과 계, 화랑과 이충무공, 조선 후기 서민문학, 퇴계성리학과 실학 등 ‘전승해야 할 유산들’을 잊지 않고 짚고 넘어가고(제2장 6절), 책의 마무리를 ‘문화와 교육’으로 삼은 것은, 박정희 혁명이념의 선진적 성격을 새삼 곱씹게 한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출간 당시 박정희는 아직 현역군인 신분이었고, 최고회의는 혁명과업이 완수되면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혁명공약’ 제6). 아직 그 시간표는 나오지 않았지만, 혹시 박정희 자신이 언젠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대권’을 잡을 꿈은 없었을까? 확실히 이때까지는 아니고, “미묘한 인식 변화가 감지”(남정욱)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듬해 1963년, <국가와 혁명과 나>부터라는 지적은 흥미롭다. <국가와 혁명과 나>는 박정희 전집 제3권(영인), 7권(평설)으로 함께 출간되었다(기파랑, 2017).
탄생 100돌(1917~2017) <박정희 전집>(全 9권) 발간
2017년은 박정희(1917. 11. 14~1979. 10. 26) 탄생 100주년. 그의 공과(功過)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이 나라는 더 잘되었을 것”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정치인 박정희를 비판, 심지어 증오하는 편에서조차 ‘오늘의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세계사에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룬 공’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18년 동안 집권하고 사후 38년이 지난 이 ‘한국현대사의 거인’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공과’가 아니라 ‘오직 과(過)’에만 집중되어 있다.
박정희는 생전에 수많은 저술을 발표하고 적지 않은 분량의 유고를 남겼는데, 그중 정식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지도자도(指導者道>(1961), <우리 민족의 나갈 길>(1962), <국가와 혁명과 나>(1963), <민족의 저력>(1971), <민족중흥의 길>(1978)의 5종이다. 2016년 말 각계 원로들로 구성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위원장 정홍원 전 국무총리. 이하, ‘추진위’)는 이 저서들을 4권의 영인본으로 재출간(<우리 민족의 나갈 길>, <지도자도>는 합본)하는 것과 동시에, 역시 4권의 ‘평설’로 풀어 쓰고(남정욱 풀어씀), 이제까지 공개된 박정희 생전의 자필 시 전편(全篇)과 일기 선집을 한데 묶은 <박정희 시집>을 합쳐 모두 9권의 ‘박정희 전집’으로 발간했다. 추진위 위원장을 맡은 정홍원 전 총리가 전집 발간사를 썼다.
박정희 저술을 모은 ‘전집’과 함께, <박정희 바로 보기> <박정희 새로 보기>(이상 기출간, 2017), <인간 박정희> <박정희 동반성장의 경제학> <현대사 최대의 거짓말: 박정희 노동착취의 허구와 진실>(이상 가제, 근간) 등 교양서 및 연구서 시리즈도 순차로 발간 중이다. 모든 출판물은 도서출판 기파랑에서 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