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인용시는 정몽주의 「모춘暮春」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늦봄’이라는 시제詩題답게 저무는 봄날의 아쉬움과 애상감을 매우 감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정치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특히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대에는 문하시중을 맡아 정계의 중심에 서서 끝까지 왕조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였고, 결국 혁명을 추진하던 반대파에 의해 선죽교 위에서 죽임을 당함으로써 충절의 대명사처럼 일컫게 되었다. 또한 포은의 학문을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계승하고, 야은의 학문을 김종직金宗直, 조광조趙光祖 등이 계승하여 훗날 이른바 “한국 성리학의 조종祖宗”이라는 영광스런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시인으로서의 포은은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필자는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그의 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그 후 십 년이 훨씬 넘는 세월 동안 포은의 시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고찰해보고 틈틈이 글을 써 왔는데, 이 작은 책은 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포은은 뛰어난 시인이다. 그의 문집인 『포은집』에 전해지는 시는 252제 정도로 비록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매우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며, 특히 감수성이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 시인으로서의 포은을 살피는 데에 있어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리학자로서의 특징이 드러난 철리시哲理詩, 중국과 일본의 사행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행시使行詩를 비롯하여 당풍唐風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 정치 현실에서 상처를 입고 유배 중에 쓴 시, 벗들과 선·후배 동료들의 죽음을 다룬 만시挽詩 등이 주를 이룬다.
본서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포은시와 성리학>으로 포은 사상의 배경과 특징을 유교경전에 대한 깊은 조예와 실천궁행의 강조, 호방한 기질과 호연지기의 배양, 춘추대의의 의리론 등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특히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실천궁행과 의리론은 포은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성리학 분야에서 당대當代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이었지만, 이론이나 논리보다는 학문의 실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포은이 평생을 종군從軍과 사행使行으로 활동하고, 정치와 교육의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것도 기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그의 학문적 태도에 기인한다. 제2장은 <포은시와 귀거래>로 평생 귀거래를 꿈꾸었지만 동시에 한 번도 정계를 떠나지 않았던 포은의 삶과 내적 갈등을 살펴보았다. 필자는 포은시에 나타나는 이 같은 두 가지의 상반된 양상을 참여와 실천의 경국의지經國意志와 고독과 그리움의 상처로 명명하여 보았다.
제3장과 4장은 포은시에 나타나는 미적 특질, 즉 미학적 측면을 다루었다. 3장은 <포은시와 심미의식>으로 포은시의 표현양식을 주로 의상意象의 운용과 객창감客窓感의 표출양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객창감은 포은시의 핵심 주제라고 생각된다. 시인이 자신의 존재를 ‘나그네’로 규정하고 살아갈 때, 세계에 대한 인식이나 삶의 태도는 그에 걸맞은 지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실 사행과 종군의 현장에서 쓴 시들에 이러한 모습이 많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포은시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객창감 또는 나그네 의식은 단순히 집을 떠나 있는 물리적 공간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며, 포은의 세계관 또는 인생관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4장은 <포은시와 당풍>으로 필자는 고려후기 한시사에서 포은을 정포, 김구용, 이숭인 등과 더불어 중요한 당시풍唐詩風 작가 중 한 명으로 규정하였다. 포은시에 나타난 당풍적 면모와 표현기법으로는 애상감哀傷感과 비개미悲慨美, 섬세한 감성과 감각미의 발현, 변방과 전장의 쓸쓸함과 애수哀愁, 사랑과 염정艶情의 시화詩化, 시의 음악성 등을 거론하였다. 독자들은 이 같은 시들을 통해 포은이 시인으로서 뛰어난 자질과 문학성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제5장은 <포은시와 만시>로 『포은집』에 보이는 죽음을 형상화한 만시挽詩를 살펴보았다. 주지하다시피 만시는 죽은 이를 추억하고 생과 사의 갈림을 아파하는 시이다. 따라서 완성도가 높은 만시의 경우, 그 어떤 시보다도 애절하고 시인의 상심이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포은은 이색, 김구용, 이숭인과 더불어 14세기 만시 작가군을 형성하는 시인 중 한 명이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포은의 관심은 여진이나 왜와의 긴박했던 전쟁터, 중국으로 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거센 풍랑을 만나 거의 죽을 뻔했던 경험 등이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만시 역시 포은시를 구성하는 주요한 한 축이자 포은시의 문학성을 대변하는 장르라 할 수 있겠다. 제6장 <포은시와 시화비평>은 역대 시화집에 거론된 포은시에 대한 제가諸家의 평을 중심으로 포은시의 품격을 살펴본 것이다. 필자는 포은시의 주된 품격을 호방豪放, 공치工緻, 표일飄逸, 아건雅健으로 규정하였다. 호방은 포은의 원대한 기상氣象 또는 기질과 관련되어 있고, 공치는 섬세한 감각미가 발현된 시이며, 표일과 아건은 탈속脫俗의 경지와 굳센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들에서 보이는 품격이다.
포은 문학을 공부하고 처음으로 글을 쓴 지도 어느덧 십수 년이 흘렀다. 그동안 필자는 포은이라는 거대한 인물과 동고동락하며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안타까운 탄식을 하였고, 그저 학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포은을 공부하고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나의 어쭙잖은 공부가 얼마나 포은의 문학과 사상, 그의 인간됨을 제대로 밝혀내었는지 도무지 자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내는 것은 포은과 포은 문학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작은 소명감 때문이며, 또 앞으로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필자 스스로의 채찍이기도 하다.
아무쪼록 동학同學들의 많은 질정叱正을 바란다. 본서에 인용된 시들 중 간혹 동일한 시가 앞뒤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한 번만 인용하고 반복되는 부분은 생략할 것도 고려해 보았지만, 인용된 그 장의 주제에 맞게 분석과 해설이 된 경우에는 인용시는 같아도 내용 설명이 다르므로 그대로 두었음을 밝힌다. 끝으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책을 출판해주신 박영사의 안종만 대표와 매번 성실하고 꼼꼼하게 글을 읽고 편집과 교정을 도맡아준 문선미 과장, 책의 출간을 주선하고 기획해준 송병민 과장께도 아울러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17년 겨울, 춘천 연구실에서
하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