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욕심이다. 이 세상에 살았던 흔적이 활자로 남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모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종이 글이 잊혀 가는 마당에 모음집으로 펴낸들 누가 관심을 기울이겠냐만, 더 이상 공적 활동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거라는 허전함이 허세를 부른 것이다. 2023년 2월에 32년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했고, 2021년 8월부터 시작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원장직도 이제 7월 말이면 끝이다. 이즈음에 뭔가 마무리 짓고 싶은 노욕이 발동한 것이니 너그러이 봐주길 바란다.
누군가가 나를 ‘사회 참여형 학자’라거나 ‘법치국가의 파수꾼’이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과분하다고 보지만 듣기 좋은 평가라 사양하고 싶지는 않다. 학자 중에는 연구자로 이름을 얻는 분도 있고, 교육자로서 명성을 떨치는 사람도 있다. 정치에 기웃거리다가 폴리페서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는 자들도 더러 있다. 연구자와 교육자로서 소홀함이 없었기에 ‘학자’로 불릴 수 있었고, 여러 형태의 사회 참여가 있었기에 학자 앞에 ‘사회 참여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고 생각한다.
법학자로서 언론에 기고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견해를 인터뷰로 밝히곤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명칭에 ‘사법개혁’이 들어가는 여러 위원회에 참가했고, 시민사회단체인 참여연대에 가입하여 공동대표의 직까지 올라 시민참여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특히 법조비리, 전관예우, 검찰개혁을 포함한 사법개혁 등 사법 정의와 법치주의 실현을 위한 비판과 대안 제시 활동을 했기에 법치국가의 파수꾼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학자로서 강단에 머물며 연구와 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이론적 토대를 쌓고 활동 반경을 넓혀 학교 밖에서도 목소리를 높인 덕이다.
목소리를 내는 방법은 주로 신문 지상에 고정으로 칼럼을 쓰는 것이었다. 사회과학 전공자지만 사회에 관한 지식과 식견이 법적 이슈에 한정되어 있어서 칼럼의 주제가 다양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쨌든 논쟁거리가 떠오를 때마다 빠지지 않고 소리를 냈다.
30년이 지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언론 칼럼은 한겨레 신문이 처음이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홍익대학교의 강단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다. ‘사기당하고 싶어 하는 사회’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시민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회과학자로서, 젊은 형법학자로서 사회현상을 짚어본 내용이다. 검색해 보니 1992년 7월 29일 자다. 정치적이든 경제력이든 힘 있는 자가 군림하고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법과 절차가 중시되면 편법도 사라지고 사기 치거나 사기당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글이었다. 법치와 민주주의의 선진국인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정의와 공정이 흐르는 사회,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염원하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언론 매체에 칼럼을 실었다. 한국일보 ‘아침을 열며’ 2003년 4월 2일 자, 주간지 시사IN ‘이것이 법이다’ 2007년 10월 5일 자(제3호) 기고를 시작으로 고정칼럼을 썼다. 그 후 경향신문과 법률신문에 오랫동안 고정칼럼 필자로 활동했다. 글 소재며 시각, 글쓰기 실력 등 한계를 느껴서 그만둬야지 하면서도 독자가 원한다는 신문사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장기간 필진으로 남게 되었다. 그 탓에 매달 때로는 두 차례씩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마감 기한을 지키느라 애를 먹었다.
2021년 8월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취임한 후 국책 연구기관장의 직책으로 칼럼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는 나의 핑곗거리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때까지 마감 기한을 넘기거나 걸러본 적이 없었다. 하기야 담당자 속을 썩이지 않은 게 고정칼럼 장수 비결이었는지 모르겠다. 경향신문은 ‘정동칼럼’을 시작으로 ‘하태훈의 법과 사회’로 이어지면서 6년여를 썼고, 법률신문 ‘서초포럼’은 이 시사평론 코너가 생긴 때부터 10년 넘도록 필진이었다. 경향신문 ‘하태훈의 법과 사회’는 2023년 10월에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철 지난 이슈에 관한 칼럼도 있고 여전히 유효한 목소리를 담은 칼럼도 있는데 이를 모아 정리했다. 그때그때의 사회적 이슈에 관한 칼럼이었으므로,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 왜 이런 내용의 칼럼이었는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당시의 신문 기사 일부를 소개하고 해당 칼럼을 수록하는 형식을 취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주로 법적 이슈를 다루고 있어서 법조 전문 언론인 법률신문의 기사를 인용했다. 흔쾌히 동의해 주신 법률신문사 이수형 대표께 감사드린다.
이 책의 제목이자 첫 장을 장식할 칼럼은 ‘겨울 지나면 봄, 정의도 자연법칙처럼’이다. 경향신문에 게재한 칼럼이다. 추운 겨울 차디찬 광장에 모여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촛불집회의 결실이 보이기 시작했던 2017년 2월 겨울 끝자락에 봄을 기다리며 쓴 것이다. 첫 회 청계광장의 집회부터 매주 토요일 거의 빠짐없이 촛불 시민혁명에 참석했던 나는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정의도 자연법칙처럼 온다는 믿음과 확신을 얻었다. 정의가 자연법칙처럼 흐르는 사회가 오기를 바라면서 쓴 글이다.
이 칼럼은 당시 신뢰의 상징이었던 언론인 손석희 앵커가 뉴스 끝 앵커 브리핑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제목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끝으로 열과 성을 다해 칼럼집을 만들어 준 박영사 임직원 여러분, 특히 장유나 차장과 조성호 이사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2024. 7.
녹음 가득한 여름, 율현동 다락 서재에서
하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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