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철학이나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칸트의 비판철학과 AI의 만남을 시도하는 이 글을 쓰게 된 사연을 밝히는 것이 좋겠다. 저자가 칸트철학에 재미를 느끼고 틈틈이 공부하던 중에, 기계학습 연구자인 레슬리 밸리언트(Leslie Valiant) 교수의 ‘기계학습을 다시 묻다(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밸리언트는 이 책에서 ‘사람의 지능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진화와 학습의 결과물이고, 이 학습 과정이 기계학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쳤다.
사람의 지능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사람은 살면서 세계의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인식의 한계는 어디인지를 밝히는 것은 칸트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칸트가 구상한 사람의 인식모델은 밸리언트의 “사람의 지능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진화와 학습의 결과물이다.”라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선지 밸리언트의 책을 읽으면서 컴퓨터 기계학습의 작동원리가 칸트의 인식모델의 작동원리와 상통하는 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다. 칸트의 인식모델을 기계학습으로 구현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에 대응해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결과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호기심의 발동으로 AI 쪽은 튜링기계, 기계학습, 딥러닝, 생성형 AI의 작동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봤다. 칸트철학 쪽은 3대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어렵고 방대해서 칸트철학의 핵심을 응축하는 것이 필요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들뢰즈(Gilles Deleuze)가 쓴 ‘칸트의 비판철학’과 독일의 철학자인 회페(Otfried Hoffe)가 쓴 ‘임마누엘 칸트’가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고 요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다음 AI 모델들과 비교하면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찾았는데, 이 과정에서 칸트철학과 AI가 더 잘 이해되고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칸트철학을 통하면 사람의 지능과 AI의 작동원리와 그 한계가 더 잘 이해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칸트는 근대과학이 출현하던 시대에서 과학과 수학의 성과를 흡수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사람의 삶에 대한 철학을 재정립했다. 들뢰즈는 칸트철학의 요약서인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칸트철학의 ‘혁명적 면모’를 재발견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칸트가 근대에 제시했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AI가 출현한 현대에서도 그 신선함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AI는 자율주행, 로봇, 의료, 금융 등 기술·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 예술, 법률 등 지적 활동의 전 분야에서 사람의 지능을 따라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AI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기에 사람의 지적 능력에 근접할 수 있는지를 칸트철학으로 분석한다.
칸트는 앎(인식, 眞), 삶(실천, 善), 느낌(아름다움, 美)의 세 가지 영역에서 사람의 지적 활동이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지를 밝혔다.
첫째,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지’의 원리를 파헤친다. 칸트는 건축가가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듯이, 사람의 경험적 지식도 설계도에 따라 축적되는 것으로 봤다. 즉, 사람은 경험 이전에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공통의 인식시스템에 따라 각자 다른 경험적 인식을 쌓아간다고 한다. 한편 튜링(Alan Turing)은 사람이 하는 계산을 튜링기계(Turing Machine)라는 모형으로 재현했다. 튜링기계가 오늘날의 컴퓨터다. 저자는 칸트의 설계도와 튜링의 모형이 매우 닮았음을 발견했다. 또한 칸트가 찾아낸 상상력과 판단력의 창조적 활동 원리가 프로그램을 스스로 찾아가는 기계학습의 작동방식과 빼닮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닮음이 단순히 개괄적으로 유사한 것을 넘어,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닮았는지를 살펴본다.
둘째,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사유한다. 칸트의 실천철학은 자유의지와 도덕법칙을 두 축으로 한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식과 자유의지를 가지는지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토대로 AI가 자기의식이나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한다. 그다음 AI의 발전단계별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칸트의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셋째,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의 느낌을 미학의 단계로 발전시켰다. 이 글에서는 들뢰즈의 예술론인 ‘감각의 논리’와 저자의 심미적 체험인 ‘지음(知音)과 심상(心象)’을 가미하여 칸트 미학의 깊이를 더하고자 했다. 예술 분야에서의 AI의 활용 현황을 살펴보고, 감정 없는 AI가 미적 판단을 할 수 있는지, 예술의 어느 단계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
칸트의 마음에 대한 철학적 통찰은 AI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체계(프레임워크)와 AI가 실현되는 사회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풍부한 생각의 실마리들로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