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01.25
책머리에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축으로 한 동북아 질서는 탈냉전 시대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1991년 미국은 한국에서의 전술핵 철수를 결정했고, 남북한은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많은 사람이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독일 통일, 소련 해체와 같은 평화가 한반도에 찾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북한은 체제 위기의 극복을 위해 모든 역량을 핵개발에 투입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으로 조성된 화해 무드와 대북 포용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협상에 의한 비핵화는 ‘공허한 레토릭’으로 전락했고,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한국이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간과한 대가는 컸다. 비대칭 전력인 북한의 핵?미사일은 우리에게 ‘실존적 위협’이 됐다. 전 세계에서 한국을 핵무기로 위협하는 국가는 북한뿐이다. 북한은 한미 양국을 이간시키려고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는 희망적 사고와 ‘비핵화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북핵 위기의 극복을 위한 현실적 대책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의 요구는 간단명료하다. 국제사회가 대북 제재를 해제하여 북한을 ‘사실상 핵무기국’(de facto NWS)으로 인정해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북한이 ‘사실상 핵무기국’이 되면, 독자적 핵억지력이 없는 한국의 안보는 파국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 한반도의 위기가 얼마나 더 심각해질지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핵위협에 대해서는 억제의 ‘신뢰성’이 가장 중요한데, 미국의 결정에 의존하는 확장억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영국 국방장관이었던 데니스 힐리(Denis Healey)는 “미국의 핵 억제력 중에서 5%는 소련을 억제하기 위해, 나머지 95%는 유럽인을 안심시키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미국이 유럽에 제공한 확장억제는 그만큼 동맹국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한반도의 사정도 유럽과 다르지 않다. 국내적으로 핵개발에 대한 찬성이 70%에 달하고, 전술핵 재배치나 핵무기 공유 등 대안이 논의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미국의 확장억제를 못 미더워하는 까닭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방위비 재협상이나 미군 철수를 요구하면, 확장억제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더욱 손상될 것이다.
저자들은 심각해지는 북핵 위기의 본질을 진단하고 대응책을 처방하고자 이 책의 집필에 나섰다. 오랫동안 이 분야를 천착해온 저자들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지형의 변화와 핵질서의 동요라는 큰 틀에서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했다. 핵확산의 역사, 핵군비통제와 대응전략, 북한의 대남 핵전략, 확장억제 및 핵잠재력, 비확산의 정치와 법 등 저자들이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고 묵직하다.
저자들은 이런 내용을 각자 책임하에 분담하여 집필했다. 전체적인 맥락은 통하지만, 일관성과 정합성은 일부 부족할 수 있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독자들은 각 장 서두의 요약과 에필로그에 정리한 ‘저자 대담’을 통해 핵심 내용과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 내용의 전거(典據)는 주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미주(尾注)는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한국은 강대국이 주도하는 비확산 체제를 묵묵히 따라왔지만, 남은 것은 ‘동방의 핵대국’ 북한의 핵공격 위협이다. 한국에 대한 핵공격 위협은 동맹의 무력화를 노리는 북한의 핵심 전략이 됐다. 1차 북핵 위기 이후 30년 이상 국제사회는 변화무쌍한 북한의 기만전술에 속절없이 당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든,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비핵화 공동선언’ 같은 몽상적 명분에서 벗어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본문에 기술한 북핵의 역사와 국제정치적 현실 및 정책 대안을 통해 우리의 선택지를 넓힐 필요가 있다.
북한의 전략핵잠수함(SSBN)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최종 완성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마지막 지푸라기’(last straw that breaks the camel’s back)가 될 수 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1996년에 그런 안보 위기를 ‘국가 생존이 위협받는 자위(self-defense)의 극한적 상황(extreme circumstance)’이라고 적시한 바 있다. 적대국의 핵위협이나 핵공격 상황은 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럼프 2기의 북핵 정책도 1기의 ‘최대 압박과 개입’처럼 파격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우선주의’ 외교로 한반도 정세는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기시다 총리의 퇴장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사태로 한미일 공조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미국이 북한과 핵동결을 전제로 제재 완화나 핵군축 협상을 추진하면, 그것은 한국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이제 한국에 필요한 것은 냉정하고 현명한 정치적 판단이다. 엄중한 북핵 위기 속에서 이 책이 올바른 정책 수립을 위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다.
이 책은 임동균 원장의 각별한 배려가 없었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30년 이상 교육?시민운동을 이끈 임 원장은 공교육 정상화에 진력한 자유 우파 기업인이자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책의 기획 시부터 저자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신 임 원장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24. 12
집필진을 대표하여
이 창 위
추 천 사
북한의 비핵화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와 같은 일이 돼버렸습니다. 냉전의 해체 이후 국제정치의 혼란과 한국의 정책적 한계를 틈타 완성된 북한의 핵개발은 우리의 안보에 본질적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런 북한의 핵개발 과정과 국제적 파급 효과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우리가 처한 안보 현실의 이해와 북핵에 대한 대응 방안의 모색에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책은 북핵 위기가 군사적 문제일 뿐 아니라 국제사회와 한국의 정책 실패가 결합된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북한은 협상을 통한 비핵화를 철저히 배제하며, 공세적 핵전략으로 대남 적대정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은 그렇게 동북아와 국제질서의 안정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됐습니다. 저자들은 급변하는 안보 환경 속에서 한국이 독자적 핵잠재력을 확보하여 안보 전략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북핵 위기의 해결 방안으로 자체 핵무장에 대한 공감대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저는 22대 국회에 입성한 후 2024년 7월, 국회에서 무궁화포럼을 발족하여 우리의 핵잠재력 확보를 위한 국회 차원의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한미원자력협정 개정 등 핵잠재력 확보를 추진하는 데 국회의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야 의원과 민간 전문가들이 망라된 북핵 대응 특위(TF)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북한의 공세적 핵전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미 확장억제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회 무궁화포럼은 31명 국회의원 회원들과의 정기적 토론회를 통해 구체적 정책 대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포럼은 군사적 접근에 그치지 않고, 경제?산업적 차원에서도 핵 문제를 발전적으로 논의하겠다는 목표를 추구합니다.
핵잠재력은 군사적 억지력 확보를 넘어 경제적 생존과 국제사회에서의 자율성 확보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농축·재처리 기술 확보는 안보 문제일 뿐 아니라, 에너지 공급망과 산업 경쟁력 강화라는 경제적 과제와 직결됩니다. 저자들은 구체적 정책 제안을 통해 한국이 국제사회와 협력하면서 스스로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핵잠재력 확보는 이제 우리 국민의 안전과 미래를 위한 필수 과제입니다. 미국의 확장억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국제 핵군비통제 체제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북핵 문제에 대한 현실적·실질적 대안과 통찰은 저희 무궁화포럼의 취지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안보 환경의 변화에 과감하고 신속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국회 무궁화포럼의 목표와 궤(軌)를 같이하는 이 책은, 한반도 안보 위기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하여, 위기 극복을 위한 귀중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기로에 선 북핵 위기, 환상과 현실의 이중주’의 출간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이 책이 담고 있는 통찰과 제안이 대한민국의 안보 미래를 설계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
2024. 12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