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발행 2025.05.20
머 리 말
민법의 해석에 있어서 법철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민법의 언어들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배적 관념 속에서 다채로운 색깔을 띨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실재에 이르는 방법을 제공하므로 철학을 통해 당대의 지배적 관념과 대화를 할 수 있다. 민법의 해석에 있어서 법철학적 기반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민법학자와 법철학자와의 대화를 마련하고자 2023년 공동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공동연구의 결과물을 하나로 모아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 대법관이 나오는 등 대법원의 구성이 다양해짐에 따라 대법원판결에 법철학적 쟁점이 등장하는 횟수가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법철학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많이 증가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주류 법학이 법철학적 관점을 투영하여 거대 담론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듯이 우리의 법학도 그 방향으로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정법에 법철학을 투영하는 작업은 무질서한 황야에서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는 희미하지만 작은 길을 내는 수고로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그러한 수고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분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본 공동연구를 제안하고 기획을 해주신 권영준 대법관님, 이 책이 출간될 수 있도록 함께 연구를 진행한 양천수 교수님, 권경휘 교수님, 이성범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서울법대 법학총서의 일부로 이 책의 발간을 허락해 주신 전원열 법학연구소장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 끝으로 출판을 맡아 주신 박영사 안종만 회장님, 안상준 대표님, 조성호 이사님, 편집과 교정을 위해 수고해 주신 김선민 이사님께도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다.
2025. 5.
집필자를 대표하여
이 계 정
추 천 사
법률가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는 법률을 해석하는 것이다. 법률해석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치열한 이론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문언과 의도와 목적을 둘러싼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률해석 이론은 대체로 거대 이론 또는 일반 이론의 성격을 띤다. 이러한 총론적 논의의 성과물은 모든 법 분야에 공통의 자양분을 제공한다. 하지만 법률의 스펙트럼은 넓게 펼쳐져 있고 법 분야마다 각각 다른 특성이 있다. 가령 실체법과 절차법의 해석론이 똑같을 수 없고, 사법과 공법의 해석론이 똑같을 수 없다. 그래서 법률해석론에도 총론뿐만 아니라 각론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청은 민법에도 존재한다. 민법은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법리를 자랑한다. 법리마다 판례도 많이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법률해석의 문제가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어떤 법 문제에 직면하면 민법 조항을 읽지 않은 채 판례나 문헌부터 검색하는 실무적 관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민법도 엄연히 실정법이므로 해석을 요구한다. 법률해석 이론은 민법의 해석에 큰 시사점을 줄 수 있다. 민법의 구체적인 해석 양상은 법률해석 이론에 큰 자극을 줄 수 있다. 민법과 법률 해석의 만남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추천자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 아래 ?민법의 해석?이라는 주제로 공동 연구를 기획하였다. 연구 능력이 탁월한 민법학자와 법철학자들로 연구진을 구성하고 공동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대법관으로 취임하면서 공동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학계를 떠났다. 하지만 이계정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이 이처럼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으니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이계정 교수는 법률해석 이론, 특히 법해석과 법형성의 문제나 입법자의 의사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와 이해를 바탕으로, 현존하는 민법 판례들을 날카롭게 검토하여 그 기저의 의미를 발굴하였다(제2장, 제6장). 양천수 교수는 민법학에서 철학적인 쟁점으로 일컬어지는 일반조항을 깊이 있게 분석하면서(제3장), 민법해석의 배후에 있는 사회상과 그 변천을 다룸으로써(제7장), 민법학에 신선한 법철학적 자극을 주었다. 이성범 교수는 민법해석에서 법윤리적 가치가 가지는 의미와 비중이라는 범상치 않은 주제를 다루는 한편(제4장), 우리 법률해석론의 중요한 기초를 이루지만 피상적으로만 이해되던 사비니의 법률해석론을 상세하게 탐구하였다(제8장). 권경휘 교수는 다원주의적 성격을 띠는 역동적 법률해석론을 세밀하게 다루었는데(제5장), 우리 법원이 취하는 해석의 경향과 맞닿은 부분이 많아 실천적으로 큰 효용을 제공한다.
법철학자들과 민법학자들이 어우러져 이처럼 수준 높은 성과물을 만들어 선사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만남과 소통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연구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도 미리 축하의 마음을 전한다.
2025. 5.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