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은 정말 훌륭한 고전이다. 고대(古代)부터 한(漢)나라 때까지의 온갖 지혜와 고사, 격언, 명구가 총망라되어 있다. 이에 우리나라 중등학교의 한문 교재는 물론 많은 동양학 서책에 빠짐없이 이 ≪설원≫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며, 우리가 늘 쓰고 있는 성어의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책에 실려 있었음을 간과한다.
“어진 스승과 훌륭한 친구가 곁에 있고, ≪시(詩)≫·≪서(書)≫·≪예(禮)≫·≪악(樂)≫과 같은 좋은 책이 그 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이를 버리고 옳지 못한 짓을 할 자는 적으리라!”(賢師良友在其側, ≪詩≫·≪書≫·≪禮≫·≪樂≫陳於前, 棄而爲不善者, 鮮矣.)
바로 이 책 <담총편>(談叢篇. 497)에 실려 있는 경구(警句)이다.
세상에는 교훈서도 많고 교양서도 많지만 이 ≪설원≫ 한 권만 읽어도 동양 고전의 진수를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많은 책 중에 ‘소장하고 싶은 책, 물려주고 싶은 책’을 들라면, 나는 고전 씨리즈는 훌쩍 버리지 말고, 그대로 집안에서 굴러다니게 놔 두어도 될 것이라 여긴다.
집안에 어떠한 책을 소장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집안의 가풍을 알 수 있으며, 자녀에게 어떤 책을 마련해주는가를 보면, 그 집 가정교육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스승과 친구, 그리고 고전의 훌륭한 책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안내자이며 가장 훌륭한 나침반이다.
특히 송(宋)나라 때 잔권(殘卷) 5권이 오늘날의 20권으로 복원되는 과정에서, <고려본(高麗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로 보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읽혀오고 소장되었던 아주 친근한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우리 심성에도 맞고 그 내용이 오늘날의 심한 경쟁, 가치관의 혼란, 도덕 부재의 상황 속에 이처럼 훌륭한 교재를 찾기 힘든 때에, 교양을 위해서는 물론 덕과 지혜를 쌓기에도 아주 적합한 고전이라고 여긴다.
고전은 “歷千劫而不古”, 즉 ‘천 겁이 흘러도 옛것이 아닌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통해 지혜를 얻고, 삶의 규구(規矩)를 찾아내며, 내 생의 가치를 확긴하는 거울이다. 게다가 그 속 성현들의 수많은 가르침은 아무리 퍼서 써도 마르지 않는 큰 저수지와 같은 것이다.
앞을 향해서만 내닫는 현대 사회에, 과거를 돌아보고, 위안을 얻고, 힐링을 얻으며, 내 지금 서 있는 좌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말초 신경만 자극하는 현대 완유물(玩遊物)에 매달린 우리에게 느림과 염담(恬淡)을 제공해 주는 이러한 고전은 아주 고마운 내비게이션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실린 이야기는 불과 몇 글자의 격언, 속담부터 수백 자에 이르는 긴 줄거리를 다룬 것으로 그 내용은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덕과 용인술(用人術), 남을 받들어 모실 때의 태도와 임무, 근본과 절도를 세워 살아가는 방법, 덕을 귀히 여기고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삶, 능력 있고 어진 이를 찾아내어 일을 맡김으로써 천하를 이롭게 해야 할 이유, 사물을 바로 보고 그에 대처할 줄 아는 지혜, 삼라만상의 본질과 귀착, 나아가 검약과 질박(質樸)의 본질적인 의미는 물론 심지어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실로 그 내용은 다양하고 그 깨우침의 방법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단막극 장편(掌篇)체이다.
무려 846장에 이르는 이 많은 이야기는 단순히 한문으로 기록된 전적(典籍)으로의 의미, 혹은 한문 문장 해석과 학습 교재로서의 가치를 넘어서, 오늘날 우리가 적용하고 이를 통해 지혜를 얻는데 조금의 손색도 없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본 ≪설원≫이 원 출전인 고사성어(故事成語)는 지금도 널리 회자(膾炙)되고 있다. 바로 초장왕(楚莊王)의 ‘절영(絶纓)’, 진문공(晉文公)의 ‘한식(寒食)’의 고사를 낳은 개자추(介子推)의 이야기, 춘추오패(春秋五霸)의 수장(首長)이 된 제환공(齊桓公)과 관중(管仲), 안자(晏子)의 번뜩이는 재치와 풍자, 곡돌사신(曲堗徙薪)의 가치관, 선인(善人)이 손해보는 것 같으나 끝내 복을 받는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이야기들……. 사실 이런 내용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당연한 척도가 되어야 할 근본의 문제이다. 그러나 글을 읽는 즐거움까지 함께 맛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고전이 가장 적합하다고 자신한다.
나는 이 책을 우리나라 각계 지도자들이 한 번 읽었으면 한다.
사회 각 분야에서 우리를 이끌고 나가는 노고에 열정을 넘어 더욱 지혜와 덕을 쌓고, 어려운 판단은 그 덕과 인본(人本)이라는 열쇠로 풀 수 있는 해답이 이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설원≫을 완역상주(完譯詳注)하여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고 준비해온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분량이 적지 않고 판본마다 문자(文字)의 이동(異同)이 있어 세밀히 하지 않으면, 자칫 망문생의(望文生義)의 오류를 범할 것으로 염려되어 이제껏 미루어 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우선 ≪전국책(戰國策)≫을 완역상주한 다음 내친김에 자료를 보충하여 작업을 시작하였다. 판본을 대조하고 문자를 확정지은 다음, 장을 나누고 다시 관련 참고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문사철(文史哲)의 전적(典籍)을 일일이 섭급(涉及)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직역 위주일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문장의 어색함은 물론 의미의 통순(通順)면에서도 누소(漏疎)함을 면할 길이 없었다.
이리하여 일찍이 1996년 정장본 2권 완질로 내어 독자들의 많은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다가 여러 사정으로 2009년 다시 나의 ‘임동석 교수의 중국사상백선’ 총서에 5권으로 분책한 책을 내어 독자들의 요구에 제공하였으며, 그 백선(百選) 총서에 많은 고전을 모아 160여 책이 넘는 방대한 작업을 이어갔었다. 이에 독자나 연구자들로부터 긍정적 평가와 성원을 얻었으며, 그 작업은 ‘死而後已’의 업보인 양 지속되어갔다. 그러나 ‘何草不黃?’이라 하였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점차 한문세대(漢文世代)는 사라지고, 고전과 종이책은 가치는 인정하되, 경제적 이유에서 완전히 밀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중단의 고배로 돌아왔다.
그러던 차에 마침 제자이기도 한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찾아와 근황을 이야기 하다가, 내가 낸 기존의 모든 책을 다시 전자책과 함께, 일부 종이책을 필요로하는 학자나 독자를 위해 적은 분량으로 출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를 해 왔다. 지금 같은 시대에 고전이 소용닿을까 하고 우려했더니, 이는 아깝기도 하고 누군가는 역주하여 남겨야 할 유산이 아니겠는가고, 그 출판 의도와 목적을 피력하였다. 비용과 손익은 뒤로 미루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연히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더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수정판>이라는 표제를 걸고 본격적인 수정, 보완, 점검에 들어섰다. 전체 원고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부호, 푯점, 체제의 통일, 편집의 일관성을 위한 전체 틀의 표준화 등인데, 그 노력과 고통은 첫 원고를 작성할 때보다 더 힘들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과거 원고지에 육필로 써서 넘기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젠 컴퓨터에 저장되어 보관하고 있던 파일을 띄워 수정보완하는 것이 더 편리할 줄 알았는데, 이 역시 나름대로 노동과 정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드디어 참으로 많은 분량을 추가할 것과 교정할 것을 다 이루고 나니, 내 자신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하고 자문하면, “그래! 업(業)이라는 것이 이런 것”하고 자답으로, 그대로 성취감을 위해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이 기다려지는 삶”이 행복했다. 삼호재 박대표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남은 책들도 ‘牛步千里’의 심정으로 갈 것이다. ‘行百里者, 半於九十’(백 리 길을 가는 자, 9십 리 왔을 때도 이제 반 왔구나라고 여겨야 한다)이라 했으니, 내 인생의 길은 매번 하나씩 마쳤을 때마다 나는 늘 9십 리에 와 있을 뿐이다.
아무쪼록 읽는 이들이나 이 책을 이용하는 자들께서 끊임없는 성원과 편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甲辰(2024)년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盂蘭盆節)
줄포(茁浦) 임동석(林東錫)이 부곽재(負郭齋)에서
<수정판>을 내면서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