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法家)는 전국시대의 그 극심한 혼란을 해결하여, 이로써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해준 기본 이론서이다. 혹자는 이 ≪韓非子≫를 서양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비기고 있으나, 오히려 훨씬 명쾌하고 정확한 구체성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역주를 마치고 나서의 ‘한비는 천재’라는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다. ‘인간을 부리는(驅使) 방법’에 있어서 말이다. 그 당시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고 그 발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더구나 잔인(殘忍)의 관점에서 통치를 보는 눈은, 지금과 같은 법치 시대가 결국 출발이 그런 것이었나 할 정도로 두려움까지 앞선다. 말더듬이 한비는 그러한 사상을 언변으로 하기 어렵기에 글쓰기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 글은 정말 대단하며 그리고 충격적이다.
우선 ‘성악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천하 사람은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는 한 마디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이(利)의 배분권(配分權)을 쥐고 있는 것이 군주요, 통치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군주는 항상 갑(甲)이어야 하며, 을(乙)이 되는 순간 즉시 신망국멸(身亡國滅)하고 만다는 논리다. 사람은 이익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시킬 수 없으며, 사람은 이익만을 위해 일을 한다는 대전제는 지금 이 시대의 일면을 보는 것 같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이익이 없이는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극단적 기준을 세우고 있는데,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임금과 신하 사이에 무슨 인간적 호소가 필요하겠는가? 나아가 지배를 받고있는 백성이 어찌 지배자의 은덕이라는 기준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겠는가? 그러니 힘이 필요하고 칼이 필요하고 공포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것을 직접 쓰면 폭군이요 악인이 되는 것이니, 대신 법이라는 거창한 그물을 만들어 그것을 명분으로 하되 위세와 권력, 나아가 생사여탈권을 그대로 집행할 수 있는 칼자루까지 쥐고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자신의 말대로 움직였고 나아가 그로 인해 공적을 이루었다면 반드시 상(利)을 내려야 하며 이 2가지가 병행될 때만이 군주는 그 자리를 잃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인간이 너무 영악해졌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나라에 정책이 있으면 개인에게는 대책이 있다”고 자신하는 피지배자들에게,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도덕 따위는 허울 좋은 하소연일 뿐 전혀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유가나 법가가 언필칭 들먹이는 법고(法古)는 앞으로만 흐르도록 되어 있는 시간의 논리에 전혀 맞지 않으며, 다가올 미래밖에 없는 시간 선상에서 창신(創新)만이 그 줄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인 가치라고 보는 것이다. 그 창신이 바로 법치요, 술수요, 궤휼(詭譎)이며 권병(權柄)이라는 것이다.
도가는 밑바탕에 세상의 네거티브 요소, 즉 결여성(缺如性)을 깔고 고차원적인 논리로 우리를 수긍을 하게 하는 맛이 있다. 그러한 도가에 근원을 두고 있는 법가는 이를 직접 실행에 옮기도록 강요하면서 효율의 극대화를 꾀하는 행동대원인 셈이다.
그 때문에 뒷사람들은 “도가, 황로술, 법가 셋은 모두가 같은 뿌리로써 한결같이 ‘인(忍)’이라는 대원칙에서 출발하였으나 그 ‘인’의 유별(流別)이 다를 뿐이다. 그리하여 ‘인내(忍耐)’의 길을 터득한 자들은 노장(老莊)의 학술로 발전하였고, ‘은인(隱忍)’의 방법을 터득한 자들은 황로술의 일파로 흘렀으며, ‘잔인(殘忍)’으로 변질된 원리를 터득한 자들은 바로 한비와 같은 법술(法術)로 변화하였다”라 하여, 이 法家는 道家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법가의 유가나 묵가는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인의(仁義)를 부르짖는 것과 같으며, 사람은 싸움을 싫어하지만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어떤 술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것이 정의(正義)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한비는 아주 명료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논리체계를 군주의 통치에 두어 그 때문에 그의 이론을 ‘군주론’이라 한다. 그러나 군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물의 원리를 그에 맞추어보면 어디에나 맞다.
다만 소은(少恩)이라는 것에 대한 당송 이후 많은 문인, 나아가 유가를 신봉하는 이들은 격렬하게 이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이는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일 뿐이다.
시대가 변하면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달라야 한다.
전국시대 그 난마(亂麻)같은 정세, 참혹한 생존 속에 어찌 인의도덕만 외우며 백인(白刃) 앞아 꿇어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없으면 칼로 잘라야 하며, 달걀을 세울 수 없으며 깨어서 세우거나, 아니면 엄청난 속도로 회전시켜 세워야 한다.
물론 파괴적인 삶만을 강요한 것은 아니다. 뒤집어보면 해결책이 있다는 주장이다. 뒤집어보려고도 하지 않는 세태를 안타까워한 것이리라.
자! 이제 한비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차분히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도리어 사람에 따라서는 반면교사의 지혜도 얻을 수 있으며 처세의 바른길을 터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한자로 ‘法’의 原字는 ‘灋’(법)이었다. 이는 “‘廌’(豸, 치)라는 상상의 외뿔 짐승이 두 사람의 송사를 듣고 있다가, 잘못을 저지른 자를 외뿔로 들이받아 물(氵)로 씻어내듯 깨끗이 제거(去)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시작된 글자로서 지금은 생문(省文)하여 ‘法’으로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법과 그에 따른 판결이란 공공의 정의를 실현해주기도 할 뿐더러 개인의 삶에서도 순간순간 ‘廌’(豸)에게 당할 죄는 짓지 않고 살게도 해주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한비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고사성어도 동원하고 있다. 즉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逆鱗’(역린), ‘矛楯, 矛楯’(모순)이며, ‘和氏之璧’(화씨지벽), ‘守株待兎’(수주대토), ‘買櫝還珠’(매독환주), ‘愛憎之變’(애증지변), ‘負薪救火’(부신구화), ‘三人成虎’(삼인성호), ‘兎死狗烹’(토사구팽), ‘劓刑鄭袖’(의형정수), ‘曾子殺猪’(증자살저), ‘猛狗社鼠’(맹구사서), ‘茅門之法’(모문지법), ‘商鞅之法’(상앙지법), ‘遠交近攻’(원교근공) 등은 읽는 재미를 더 해주고 있다. 역자는 이들 성어의 원전도 모두 찾아 출전의 선후도 밝혀 참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전은 큰 저수지와 같다. 그 물을 사용하는 자, 그리고 그 물을 뜨러 나선 자의 그릇의 크기, 나아가 왜 그 물이 필요한지에 따라 얻는 소득과 효용, 떠가는 양이 각각 다르리라.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축리(逐利)가 정당한 이상, 한비의 이 논리를 인용(認容)하고 긍정적으로 받아 나의 그릇에 담아보아도 될 듯하다.
일찍이 나는 이 방대한 ≪한비자≫ 역주를 내었으나 여러 사정으로 그 다음의 작업이 중단되어 낙담하고 있던 터에, 마침 삼호재(三乎齋)에서 <수정판>으로 재출간하여 귀한 자료가 널리 퍼지고, 학술적인 면은 물론, 이를 읽고 참고로 삼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제공하자는 제안이 들어와 다시 한번 살펴보고 교정을 가하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기고 있다.
2024 甲辰年 6월 夏至 지나서
줄포(茁浦) 임동석(林東錫)이 부곽재(負郭齋)에서 다시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