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모두 비룡재천(飛龍在天)을 꿈꾸며 육신까지 괴롭힐 때, ‘잠룡물용(潛龍勿用)’으로 살겠다고 다짐하여 ‘여세부쟁(與世不爭)’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혹 너무 소극적이라 할지 모르나, 실제 가장 적극적인 것은 남이 하찮다고 여기는 것을 굳이 실천하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老子)도 ‘수유왈강(守柔曰强)’이라 하였다.
실제 이렇게 살면서 대산 자신의 세계관과 정치철학을 시원하게 토설(吐說)한 학자가 있었다. 바로 동한(東漢) 때의 왕부(王符: 85∼162? 163?)라는 인물이며 ≪잠부론≫이라는 결과물이다.
“어린아이에게 병이 잦듯이 귀인에게는 화(禍)가 잦다. 부모에게 자식 교육에 실수가 잦듯이 지도자에게는 구설수가 잦다.
부모의 실수는 자식 사랑이 지나치기 때문이요, 지도자의 구설수는 교만한 행동을 고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개인과 백성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줄 무한책임을 지고 있는가?”
2세기 경 중국 동한 왕조 시대에 이러한 생각을 표출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학술 활동은 동한 시대까지만 해도 기존 춘추전국(春秋戰國)의 경학과 제자백가의 자료를 정리하고 재편집하는 풍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독특하게 개인의 의견이나 사상만을 저술한 예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잠부론≫은 바로 동한 삼대저작(三大著作)인 왕충(王充) ≪논형(論衡)≫과 중장통(仲長統) ≪창언(昌言)≫과 더불어 그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 중 개인 정치평론이며 철학서로는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선 그 제목 자체가 ≪주역(周易)≫의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 “잠긴 용은 쓰지 않는다(潛龍勿用)”의 심오한 철리(哲理)를 두고 취명(取名)한 것이며, 이로써 저자 왕부는 정계, 관계 등에 일체의 공직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고, 오로지 독서와 저술로 일관한 “잠부(潛夫)”, 그 이름다운 기개를 그대로 실천한 인물임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 자신을 가탁하여 <잠부>라는 가공인물을 내세워 천하의 이치와 자신의 의견을 대화체로 토론한 <석난(釋難)>의 독특한 서술 형식의 도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책의 체제는 총 36편으로 각 편마다 제목을 달아 토론과 평론의 주제로 삼고 있으며, 내용은 당시 정치의 득실에 관한 것, 관리의 사치와 부패, 낭비와 탐학, 백성에 대한 무책임한 군림, 이에 대한 폭로와 해결 방안의 제시, 그 밖에 미신 타파와 변방 이민족에 대한 정책과 국방의 중요성, 주민 이주 정책의 실효와 백성의 고통, 인물 중시 정책에 관한 자신의 견해, 소송과 형법 제도의 불공정성과 시간 지연으로 인한 백성의 원성, 그런가 하면 점과 꿈의 해몽, 무당과 관상 등 당시 사회 풍조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등 매우 다양하고 사실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고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계보와 덕치, 성씨(姓氏)의 유래와 분파에 대한 것은 중국 상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의 왕부 사상은 성인정치(聖人政治)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내세우는 중국 고대 다른 사상과 판이하게 다를 뿐더러, 구체적인 사례와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 점은 오늘날의 사회 현상에 비추어 보아도 혁신적이며 창의적이다.
이에 ≪후한서(後漢書)≫(王符傳)에는 그를 두고 “당시의 좀 벌레를 정확히 보고, 정치문제를 훌륭히 밝혔다”라 하였고, 한유(韓愈)는 “일대 현자의 대표”라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사상은 앞서 밝힌 대로 “위정자(국가)는 개개인(백성)의 행복과 안전을 적극적으로 책임지고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대명제를 정점으로 삼고, 세부적인 방법으로 부패와 낭비, 위정자의 위선이 척결되지 않고는 실행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군주와 관리는 ‘하늘이 대신 사회를 조직화하여 이끌어 나가도록 임무를 빌려준 것’(天工人其代之)이지, 백성에게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고 곳곳에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지금 나는 우리의 정치가나 사회지도층이 이 ≪잠부론≫ 36편 중에 단 몇 편이라도 읽었으면 하고 권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아침 출근길의 차창 밖에 보이는 국민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가 하는 평범한 진리가 진하게 가슴에 와닿으리라 믿는다.
그러한 아침의 출근 후 근무에 어찌 부정한 결재가 있을 수 있겠으며, 그러한 날 저녁에 어찌 나의 알량한 권력을 남용하여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부패의 술잔에 손이 갈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일찍이 두 차례 출간되었었다. 그런데 미진한 부분이 있어 언젠가는 다시 정리하고 보완, 수정하여 재출간을 해야겠다고 늘 마음 한 구석 과제를 안고 살아왔는데 마침 3년전 제자이며 출판업에 공헌을 하고 있는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찾아와 이제껏 내가 내었던 “100여 종의 고전 역주를 모두 전자화(電子化)하고 이를 책으로 내었으면”하는 의견을 피력해 왔다.
아마 내 이제 ‘齒髮疎’를 넘어 ‘不踰矩’의 나이에 들자, 하늘이 “그간 성과를 깨끗하고 깔끔하게 마무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하는 사명으로 들렸다. 그 위대한 공자도 “加我數年, 卒以學≪易≫, 可以無大過矣”라 하였는데, 나에게 이러한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둔학(鈍學)으로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에 그동안 단 하루도 쉼이 없이 그간 성과를 수정, 보완, 교정, 재검하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오히려 행복하고 고마운 일상(日常)이었다.
그러나 혹 미진하고 누소(漏疎)한 부분은 면치 못할 것이라 여긴다. 이 자료를 활용하는 제현(諸賢)께서 살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2024년 甲辰年 9월 17일(陰曆 中秋節)에
茁浦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다시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