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래 박복한 사람이니, 마땅히 덕을 후하게 베푸는 일을 실행해야 할 것이며, 나는 본래 박덕한 사람이니, 마땅히 나에게 주어진 복을 아껴 쓰며 살아야 하리라.”(吾本薄福人, 宜行厚德事; 吾本薄德人, 宜行惜福事.)
이는 명대(明代) 진계유(陳繼儒)라는 사람의 ≪미공십부집(眉公十部集)≫에 실려 있는 명구이다.
나는 불유구(不踰矩)의 나이에 내 자신 살아온 역정과 지금 내가 살로 있는 모습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가? 복을 아끼며(惜福) 살고 있는가? 조상이 준 복을 허투루 쓰거나, 내 후손이 누릴 복을 미리 앞당겨 내가 쓰고 있지는 않은가?
역시 지금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살고 있고, 복도 앞뒤 없이 이기적으로 나만 쓰고 있는 것 같다.
실은 욕심을 버리겠다는 욕심조차 끊어야 할 나이임에도 말이다.
우선 살아온 과거부터 살펴보아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뜻대로 되지 않은 일도 많았고 뜻밖에 잘된 일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잘된 일은 곰곰 생각해 보면 남의 도움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었고, 뜻대로 안 된 일은 결국 나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지 않은 일이 없었다. 바로 그릇된 욕심이 그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던 일의 원인이요, 남의 탓으로 돌린 것이 괴로움을 당했던 그때의 이유였던 것이다.
어릴 때 어머니는 나를 두고 늘 “너는 인복이 있어 어려울 때마다 누군가가 너를 도와줄 거야”라고 일러주셨다. 그렇다면 지금 이처럼 살만한 것은 모두가 남의 도움이었다. 갚아야 한다. 더구나 다시 어머님 말씀대로 “이승에서 진 빚은 이승에서 갚고 가야 한다”라 했으니, 인생의 반은 갚는데 써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은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비춰보는 정신의 거울은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잊고 산다. 몸과 정신은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 또 스스로 균형을 이루도록 몸은 음식과 운동으로 보양하고, 정신은 명상과 독서로 항상 수양해야 한다.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은 자신의 용모나 옷차림이 남에게 예에 어긋남이 없도록 단정함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의 거울은 내 자신을 수양하고 지족과 안분, 남을 배려하는 마음, 교양의 정도와 행복감을 스스로 점검하고 느끼며 다짐하는 거울이다.
그러한 거울로서 우리나라 조선시대부터 누구나 읽고 감탄하며 일상생활의 언어 속에 녹여온 책이 바로 이 ≪명심보감≫이라는 훌륭한 교양서이며, 이름 그대로 “마음을 밝혀주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수백 년 동안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우리 심성에 커다란 영양분으로 자리잡고 있는 마당에 이 책을 다시 수정하여 마음의 거울로 삼게 된 것 자체가 나에게 큰 행복감을 주고 있다. 매일 읽기가 어렵다면 항상 곁에 두고 손에 잡히는 대로 어느 페이지나 넘겨, 보이는 대로 읽어보아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고, 감사하며 고개 끄덕임으로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삼아도 될 정도의 참가치를 지닌 책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우리는 육신을 비추는 거울은 얼마든지 가지고 있으니, 이제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도 하나 준비해 놓고 수시로 나를 비추어 보자.
안지추(顏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에 “사람으로 태어나기가 가장 어렵다”(人生難得)라고 했다. 이렇게 삼라만상 중에 가장 어렵게 태어난 고귀한 존재인데 어찌 일생을 허투루 살 수 있으며, 어찌 세상살이에 악을 지을 겨를이 있겠는가?
≪명심보감≫은 바로 그러한 이치를 일러주는 반성의 거울이요, 앞으로 살아가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아도 되는 수양의 지침서이다. 이러한 거울이 때묻지 않도록 닦고 또 닦아 깨끗한 거울로 간직하여, 참된 삶을 살아가기로 노력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원문이 주로 대구나 연구(聯句)로 되어 있어, 이를 원문대로 외워 대화에 이용해보면 훨씬 그 참 맛이 드러나기에 지금부터라도 차근히 입에 외우고 다니리라 다짐해 본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이 ≪명심보감≫에 나오는 한두 구절쯤 외우지 못하는 이가 없을 것이다.
흔히 어느 집이나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구절은 예쁘게 써서 가정의 화목을 위한 가훈으로 삼기도 하고,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서당이나 학교에서 이를 외우고 쓰며, 그 구절구절마다 그것이 세상 살아가는 하나의 방편임을 확신하기도 하였다. 유태인에게 ≪탈무드≫가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이 ≪명심보감≫이 있었던 것이다.
온갖 지혜를 일러주었으며, 어린이에게는 훌륭한 교육 교재로, 나이 들어서는 안분(安分)과 지족(知足)의 안정감을 주는 그러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 ≪명심보감≫은 원래 중국 명(明)나라 때 무림(武林, 지금의 浙江 杭州) 사람 범립본(范立本)이라는 이가 홍무(洪武) 26년(1,393)에 편집한 통속적인 명언집이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곧바로 사라져 전해오지 않는 책이었다.
이 책은 고전의 훌륭한 구절이나 격언, 속담, 이언(俚諺)은 물론 당시까지 민간에 흔히 쓰이던 구어체의 대구(對句)나 경구(警句)들을 모아 20가지 편장으로 나누어 편찬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단종 2년(1454)에 이미 청주에서 <복각본>이 나왔으나 내용이 불교, 도교의 것이 많고, 문체도 순수 고문체(古文體)가 아니며, 더러는 백화체(白話體)가 있다는 이유로 즉시 잊혀다가, 1550년에 <초략본>이 나타났고(담양본), 그 뒤 중국에서조차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되자, 엉뚱하게 노당(露堂) 추적(秋適)이 저술한 한국 책으로 잘못 알려지는 촌극을 빚고 만 것이다.
이 책은 조선 시대에 복간되어 아동들의 입학 입문서로써 ≪천자문≫, ≪계몽편≫, ≪동몽선습≫을 떼고 나면 책거리를 거쳐, 바로 이 ≪명심보감≫으로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500년을 넘어 지금도 우리 심성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의 한두 구절쯤 입에 달고 다니지 않으면 제대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인간 됨의 척도를 일러주는 수신서였다.
그런가 하면 이웃 일본에는 임란 때 우리 판본이 건너갔고, 일본의 지식인이라면 이 책을 금과옥조처럼 여겨 자신들의 저술과 문장에 즐겨 인용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이를 연구하여 근세 일본의 정신적 밑바탕을 이룬 엄청난 양식이 되어주었다. 게다가 월남에 전수되어 지금도 출판과 번역이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한문으로 쓰여진 그 많은 중국(동양) 서적 중에 최초로 서양에 번역된 기이한 책’이 바로 우리의 청주판 ≪명심보감≫이라는 사실은 도리어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서구에 번역된 이 책은 서구의 이름난 철학가와 종교학자들은 이를 읽고, “서양에 성경에 있듯이 동양에는 명심보감이 있다”라 어겨, 성경에 상응하는 구절들을 정리하여 선교의 기본 교재로 먼저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으로 소중히 여겼다.
이처럼 ≪명심보감≫하면 우리 한국이 가장 먼저, 그리고 널리 읽었고, 서구에까지 전파되어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도서였음에도 오히려 우리가 그저 상식적으로 그저 “조선시대부터 흔하게 읽혔던 책”쯤으로 여기고 있는 동안 해외와 외국에서는 그 가치가 찬연히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 우리나라에서는 이제껏 완정한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다.
더구나 책의 애초 편찬 작업이 중국에서 중국인에 의해 시작된 것임에도, 실제 중국에서는 기대만큼 성황이나 보급을 이루지 못하다가, 참으로 신기하게도 한류 바람으로 <대장금> 연속극에 이 ≪명심보감≫을 읽는 모습이 출현하자 지금 중국에서도 이 책 찾기와 새로운 조명에 열기가 고조되고 있다니, 심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명심보감≫은 상하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간본 청주판은 모두 775장의 격언, 속담, 이언, 어록, 속어, 금언과 옛 문헌 속의 문장이 절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 원나라가 물러가고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선 지 26년만인 1393년 무림(武林) 사람 범립본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다. 비로 이 해는 우리 조선이 건국한 이듬해였다.
이 책이 전래되자 조선의 건국이념과 유가사상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여, 즉시 복간(覆刊)을 서둘러 단종 2년(1454)에 청주에서 큰 글자로 교정하여 간행한다는 「新刊校正大字≪明心寶鑑≫」이라는 책 이름으로 간행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편찬된 지 62년 만이다. 여기서 ‘신간대자’라 함은 좀 더 널리 보급하여 아동들이 보고 쉽도록 하기 위하여 큰 글자로 교정을 거친 다음 새롭게 간행하였다는 뜻일 터이니, 중국 원전이 아마 소자(小字)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는 이 책을 중국 못지 않게 중시하여 그보다 더 큰 글자로 간행함으로써 보급에 대한 의욕과 눈에 쉽게 익힐 수 있는 교재로서의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가치를 부가한 것이리라.
그리고 친절하게 매 조(條, 章)마다 ‘○’로써 구분하여 분장(分章)까지 세심하게 나누어주는 친절함도 보였다.
이는 월남판이나 다른 나라 판본이 분장 구분이 없는 것과는 커다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는 우리에게 전래 된 다음 우리가 독자적으로 추가한 작업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 이 초간본은 희미해지고 도리어 3분의 1분량의 초략본이 나타났으며, 그로부터 초간본은 완전히 잊힌 채, 작업자도 알 수 없는 초간본이 지방별, 시대별로 출간되어 온 조선에 성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범립본이라는 중국인 편찬자의 이름은 물론, 이 책이 중국에서 나왔다는 것조차 까맣게 모른 채 미궁을 헤매더니, 급기야 고려말 노당(露堂) 추적(秋適, 1246∼1317)이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여겨, “한국인에 의한 한국에서 저술된 책”인 양 잘못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명심보감≫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고, 혹 ‘추적이라는 사람이 지은 것’으로 오해해 왔으며, 지금도 더러는 추적이 지은 것으로 명기하여 출간된 도서가 버젓이 세상에 나돌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선 후기부터 구한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증보가 더해졌으며 거기에 청(淸) 서정(徐珽)의 ≪계궁지(桂宮志)≫에 실려 있는 <팔반가(八反歌)>를 실었고, 나아가 삼국시대 인물들과 조선 후기 인물의 효행, 애국, 청렴 등의 우리나라 자료를 더 보태어 민족의식 고양에 한몫을 하는 책으로 후미를 장식하기에 이른다.
증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1974년 이우성 교수에 의해 초간본 청주판이 동해안 모처에서 발견되어 드디어 원점이 어디였었는지가 소상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특히 이 청주판 초간본에는 범립본의 서문과 유득화(庾得和)의 발문, 그리고 간기(刊記)까지 있어, 움직일 수 없는 확증적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안타깝게도 8쪽이 낙질된 상태였다.
당시 필자는 이 판본을 근거로 미흡하나마 역주를 서둘렀으나 ,그 미진함과 안타까움에 수소문 끝에 마침 한국에 교환 교수로 와 있던 장위동(張衛東) 교수가 근세 중국 어휘 전공으로, 한국 역학서(譯學書)와 고서에 대한 관심이 깊어 체류 중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 끝에 ≪명심보감≫이 화제가 되었으나 그저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그가 귀국하여 심천대학(深圳大學)으로 적을 옮기고 나서, 얼마 뒤 월남판 ≪명심보감≫을 구했다며 편지와 함께 복사본을 보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명심보감≫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국제 학술회의에서 논문도 발표하고 대학원 석사반 학생으로 하여금 학위논문도 작성하도록 하고 있다며 나의 자료도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이 월남판 ≪명심보감≫(Minh Tam Bao Giam)을 얻어 청주본에서 누락 낙장된 <교우편(交友篇)>과 <존신편(存信篇)>, 그리고 <부행편(婦行篇)> 등 8페지의 내용을 찾아 복원하였다.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며 곧 출판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분장이 전혀 달라 청주판 목록에 제시된 장수(章數)와의 대조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둘 모두 일본 사정에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차, 그 다음 해(2009) 6월 더운 날, 한창 다른 책 역주작업에 정신이 없었는데 연구실로 부산 동명대의 성해준(成海俊) 교수가 전화를 주었다.
그는 일본에서 근대 한일사상사(韓日思想史)를 연구 주제로 하고 있으며, 나의 논문도 살펴보았다 하면서, 그 중 ≪명심보감≫이 일본에 미친 영향을 주로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청주판 ≪명심보감≫ 완정본(完整本)이 츠쿠바(筑波)대학 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물론 한국, 중국, 스페인, 월남의 이 ≪명심보감≫ 판본과 연구 과정에 대하여 너무나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흥분 속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 한 보따리의 소포가 도착하였다. 성 교수의 박사학위논문 ≪日本における明心寶鑑受容の思想史的硏究≫(東北大學 1999)와 청주판 초간본 복사 묶음, 그리고 온통 ≪명심보감≫에 관한 소논문 16편이었으며, 나아가 북경의 친지로부터 구했다는 도광본 ≪명심보감≫(내용은 ≪현문≫임)의 특이한 자료까지 들어 있는 것이었다.
하늘의 도움이었다. 천우신조였다. 그리고 내가 일본 학계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성교수의 논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더니 가위(可謂) 지구상 ≪명심보감≫에 대한 모든 자료는 다 모으고 동서양의 사정까지 훤하게 알 수 있는 귀한 보물로써 본 책의 역주에 소중하게 참고로 삼을 수 있었다.
좌우간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다시 한국 사람에게 얼굴을 보여준 청주본은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여 일본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으며, 나아가 멀리 스페인과 서구에 영향을 주었다니, ‘책 하나가 이토록 눈물겨운 유전(流轉)의 과정을 거쳤구나’하는 감회를 지금도 접을 수가 없다.
이제 명실공히 ≪명심보감≫은 한층 높고 세밀하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기하는 역주본으로 독자와 학계에 제공할 수 있게 되었음을 큰 자부심으로 삼으며, 아울러 그 바탕에 성해준 교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음을 이 지면으로나마 밝히며 동시에 지극한 감사를 표한다.
아울러 본인은 이제껏 ≪명심보감≫에 대한 논문도 꽤 작성하여 국제학술회의에서도 발표하였고, 아울러 역주본 ≪명심보감≫도 몇 차례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여러 사정으로 이번에 삼호재(三乎齋)에서 그간 나의 총서를 다시 <수정본>으로 출간하고자 한다기에 지금 그 많은 원고 정리와 수정, 재검증에 아주 심한 열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미진했던 점을 다시 보고 고친다는 즐거움은 사실 어디에도 비길 바가 아니다. 어쨌거나 삼호재 박노일(朴魯一) 대표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甲辰年(2024) 冬至 莎浦 林東錫이 負郭齋에서 일부 고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