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나는 덕유산 자락의 시골 마을에서 나서 조부모님과 부모님 슬하에서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도 자애로운 사랑을 받고 초등학교를 다녔다. 도청 소재지가 있는 큰 도시의 중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외롭고 고향집 생각이 하루도 떠나지 않는 나날이었다. 학교 수업이 좀 일찍 끝나는 날에는, 나는 하숙집 가까이에 있는 도립도서관에 달려가서 문학전집에서부터 대중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우리 집 생각을 달래곤 하였다. 그러던 중 중국의 4대 기서라 하는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그리고 《삼국지》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서유기》는 허황된 상상의 이야기이고, 《수호지》는 양산박 의적들의 이야기로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금병매》도 있을 법한 인간의 이야기였지만, 《삼국지》에는 충의의 교훈이 있고 삶의 지혜가 담겨 있어 그 읽는 재미는 단연 으뜸이라 여겨졌다. 한번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놓지 않게 되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마력이 있었다.
나는 그때 여러 종류의 삼국지를 거의 다 읽었는데, 특히 그 중에서 1954년에 정음사가 펴낸 전 10권으로 된 《삼국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당시 책자에는 번역 및 발행인이 최영해라는 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후 오래 지나서야 원 번역자가 구보 박태원 씨였고 약 반 정도 번역한 상태에서 그가 월북하여, 최영해씨가 그 문체로 마무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 번역의 문체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이를 읽느라고 하숙방에서 밤을 지새우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건대, 도서관에서 《삼국지》를 대출받아 대나무 숲 벤치에서 깊이 탐독하고 있을 때 바람이 불어 대나무 잎이 흔들렸다. 바로 이때, ‘역사는 흐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1학년 때, 가정 형편으로 일 년 휴학하게 되어 나는 조부님의 말씀을 따라 1년 동안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강지(江贄)의 《통감절요》를 배웠는데 권20에서 권26까지가 삼국지 역사였고 앞서의 중학교 때 읽은 《삼국지》는 기실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라고 불리는 소설임을 알게 되었다. 대학 1, 2학년 때, 대학, 중용, 논어, 맹자와 시경 교과목을 이수하면서 자연스럽게 한문 원전에 가까워졌고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진수(陳壽)의 《삼국지》를 탐독하게 되었다. 대학, 대학원을 마치고 그 후 교수로 재임할 당시에는 전공 분야인 사회과학 영역의 연구와 강의로 하루하루가 채워지면서, 삼국지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1992년 우연히 몇몇 교수들과 관악산 등산을 하면서 삼국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삼국지를 사랑하는 교수들의 모임〉으로 이어졌고, 동호인들의 상당한 호응 가운데 춘하추동으로 정례적인 삼국지 세미나가 20여 년간 진행되었다. 나는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나 스스로 《삼국지 배송지(裴松之) 주》와 범엽(范曄)의 《후한서 본기》, 그중에 삼국지 인물과 겹쳐지게 입전된 《후한서 열전》 13명의 인물을 깊이 탐독하게 되었다. 이어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 권 55 제1차 당고의 화에서 권81 진(晉)나라의 천하통일까지, 그리고 방현령(房玄齡) 《진서》의 진선제기, 두예전, 왕준전을 깊이 있게 파고들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도서관 대나무 숲에서 소설 《삼국지연의》를 읽을 때 떠올랐던 ‘역사는 흐른다’는 문제의식에서 이제는 역사 《삼국지》를 통해 1,800년 전 약 1세기에 걸친 긴 전란의 ‘삼국시대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은 무엇인가’라는 테제에 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찍이 삼국지의 삼국시대 제갈량(諸葛亮)은 융중대에서 “조조를 원소와 비교해 보면, 명성은 희미하고 병력은 적었지만 마침내 조조가 원소를 무찌르고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오로지 천시(天時)때문만이 아니라 인모(人謀)에 의지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역사를 이끌어 가는 추동력은 인간의 의지 작용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택동(毛澤東)은 그의 〈지구전을 논함〉에서 “의식적 능동성은 인간 특유의 특성이다. 이 특성은 전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분명히 승패는 전쟁을 수행하는 쌍방의 고유한 일련의 조건들 전체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이 조건들은 승패의 가능성을 결정할 뿐이며, 승패에 대한 결정을 초래하는 데에는 전쟁에서의 의식적 능동성이 필요하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 변동의 패러다임에서 후한 왕조가 무너지고, 삼국지의 삼국시대 약 100년 동안 격동하는 난세에 접어들면서 군웅할거시대를 거쳐 마침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정립으로 압축되고, 그 세 나라는 각기 주군, 모신, 무장들의 ‘의지와 계책’이라는 추동력을 다해 천하통일을 향한 쟁패를 펼쳐나간다. 파란만장하게 역사에 수놓아진 이 인물들의 역사 대서사시를 본서 〈삼국지 인물론〉에서 한 올 한 올 풀어 펼쳐나가려고 한다.
모택동은 〈심원춘 장사〉에서 “아, 광대무변하여라 / 묻노라 이 창망한 대지 위 / 인간의 모든 운명 주재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라며 역사의 추동력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이에 대해 〈심원춘 설〉에서 “모두가 흘러가 버린 일/ 정녕 영걸을 찾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라고 화답하고 있다.
삼국지의 삼국시대라고 하는 그 옛날(古)의 역사 추동력의 주술을 풀어낼 마법은 다름 아닌 여러분의 오늘날(今)이다. 나는 삼국지 텍스트의 역사 인식에서 진실로 고금의 만남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하며 이 같은 지평이 본서의 독자에게 조그마한 울림으로라도 다가간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2008년 3월 봄 눈발이 흩날리던 날, 서울시민대학에서 〈삼국지와 삶의 세계〉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삼국지 인물론〉 저술을 구상하게 되었다. 큰 설렘과 또한 두려움이 함께 하였다. 높은 산에 등산해 본 경험도 없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려는 계획으로 등산용품 가게에서 서성이는 심정이었다. 그 동안 ‘미쳐야 미친다’는 말이 있듯이, 삼국지의 세계에 흠뻑 빠져 거의 8여 년이 된 2017년에 〈삼국지 인물론〉의 프롤로그prologue라 할 《삼국지 군웅할거 인물론》을 출간한 바 있다. 삼국지 마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삼국지 수준을 업그레이드 했다는 격려도 받았으나 삼국지 인물들의 성격 분석을 다원적 프리즘으로 시도하다 보니 사료가 중복되는 등 첫 작품으로 미흡함도 적지 않았다. 그 후 또 만 8년이 지나 이제 〈삼국지 인물론〉의 본령이라고 할, 삼국정립의 양 대척점에 서있는 위(魏)와 촉(蜀)의 《삼국지 조조 천하 꿈 펼친 모신 무장들》과 《삼국지 유비 한실 꿈 펼친 모신 무장들》 등 두 권을 동시에 상재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2008년 3월 〈삼국지 인물론〉 저술 구상 후, 삼국지의 세계에 미쳐 있었으나 해찰을 많이 하는 등 저자의 미흡함이 적지 않았으나, 이번에 상재하는 두 책자는 〈삼국지 인물론〉의 본령을 다루게 됨에 저자 나름대로는 쓰고 싶은 대로 힘껏 썼다는 속내를 표하면서 동학제현의 관심과 많은 질정을 바라는 바다.
오랜 집필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게 꾸준히 힘이 되게 격려해 주신 친우 동창님, 〈삼국지와 삶의 세계〉 강좌에 오래 참여 하신 회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원고 정리에 수고를 아끼지 않은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제자인 이성우, 이희종 군에게 그 동안 수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끝으로 본서의 출간을 기꺼이 맡아준 박영사 기획/마케팅 편집 담당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2025년 5월
고금재(古今齋)에서
저자 한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