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학습을 위한 책’(幼學)?
전혀 아니다. 아마 이 책을 들여다보면 어른에게도 벅찰 만큼 많은 내용과 수없는 고사, 성어, 어원, 교훈 등이 들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무려 3천 가지 가까이나 된다. 이야기를 풀어서 스토리텔링으로 바꾸면 수천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게다가 알지 못하고 있던 우리 어휘의 어원이나 근거도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破鏡’은 흔히 혼인 생활의 파탄을 일컫지만 도리어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만남’의 뜻이며, 동시에 怪獸의 이름이기도 하다.(329) 또한 ‘비조(鼻祖)’는 왜 코(鼻)를 들어 첫 시조(始祖)라 했을까? 이는 사람은 태 속에서 코가 제일 먼저 생긴다는 속설 때문이었다.(255)
이처럼 매 구절마다 흥미가 진진하며, 내용이 신기하다. 어른부터 읽고 나면 상식이 풍부해질 뿐 아니라 공부의 재미가 이런 것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압축된 구절일 뿐, 중국의 모든 고전을 두루 섭력하거나 찾아보지 않으면 피상적인 겉핥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에 본인은 팔을 걷어붙이고 모든 책들, 즉 경사자집(經史子集)에서 매 구절마다 원출천을 찾아내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매달렸다. 엄청난 양이었다. 가위 小宇宙, 작은 도서관에 파묻혀 작업에 빠진 기분이었다. 찾아 확인할 때마다의 기쁨을 위한 것일 뿐, 창작의 연구는 아니었기에 어쩌면 치발소(齒髮疎)의 노년에 소일거리였을 수도 있다. 아울러 이제껏 내가 해온 그 많은 역주작업의 총 마무리가 도리어 幼學(小學, 蒙學)으로 되돌아온 원점환원의 단계로 이어졌음을 행복하게 여길 뿐이다.
필자는 오래전에 명대 格言書와 蒙學書 중에 가장 중요하고 훌륭하다고 널리 알려진 ≪明心寶鑑≫, ≪菜根譚≫, ≪賢文≫, ≪三字經≫, ≪二十四孝≫, ≪千字文≫, ≪蒙求≫ 등 완역하여 마치면서 매우 신기한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즉 나이 들어 이들 아동용이라 분류된 몽학서(蒙學書)와 처세명언집을 완전히 새롭게 샅샅이 파고들면서 ‘그래, 맞아!’하고 감탄이 절로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나아가 구절마다 문장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임을 절감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공부한 보람이 이런 것이려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사치요 거만이었다.
춘추시대 거백옥(蘧伯玉)이라는 사람은 공자도 무척 칭찬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나이 쉰이 되어서 마흔아홉까지의 삶이 그릇되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스스로 후회하였다. 그런데 내 나이 이미 불유구(不踰矩)가 훨씬 넘었는데도 이제껏 내 잘난 줄 알았고, ‘나는 그렇게 못되게 살지 않았어라’고 독선을 부린 엊그제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고, 나아가 깨닫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 그믐밤에 촛불 하나들고 어두운 산길을 헤맨 것임을 자인할 줄 몰랐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이 ≪유학경림≫이라는 책은 문학서는 아니다.
더구나 역사서도 아니며 무슨 아름다운 작품도 아니다.
그저 어린아이가 익혀야 할 필수적인 상식이라는 뜻을 가진 하찮은 책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고대 봉건적 사회 명대(明代) 중국 전통적인 몽학서(蒙學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이 책을 역주하면서 앞서 말한 다른 책을 작업할 때처럼 무한한 기쁨과 또 다른 발견에 스스로를 고맙게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혜의 바다에 풍덩 빠지고, 지식의 숲 속을 실컷 헤맨 느낌이었으며, ‘학해무애(學海無涯)’의 순박한 감동이 기대보다 많이 내게 다가왔다.
하늘의 섭리와 땅의 이치, 우주의 생성과 만물의 순환, 그리고 삼라만상의 인간을 위한 명칭과 인륜의 정도(正道)는 도리어 사회화된 규범어일 뿐, 실제는 그저 생활 그 자체이며, 앉아서 천 리를 보고, 서서는 만 리를 보며(坐見千里, 立觀萬里), 누워 상상하면 천 년을 꿰뚫고, 굽어 내려다보면 만 년을 직시할 수 있는(臥觀千年, 俯覿萬載) 어린아이의 발견의 기쁨, 그런 것이 들어있었다.
그래서 물건을 닫을 때는 왼손가락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그보다 큰 힘의 오른 손으로 풀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 가슴의 문을 잠글 때는 어린아이 힘으로 해야 하리라. 그래야 어른의 힘으로 풀 수 있다. 나아가 이 삶의 소중한 인연을 어쩔 수 없이 닫아야 한다면 내 가장 약한 눈물로 닫으리라. 그래야 다시 풀 때 시원한 함박웃음으로 열지 않겠는가?
이 천지자연에 내가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계절은 나에게 그 때마다 꽃을 보여주고 구름을 얹어주며 바람으로 옷깃을 흔들어주고, 아니 매서운 추위를 주고 견딜 수 없는 폭풍우까지 선사해주는가?
산길 능선을 걷도록 해주고 더덕과 삽주 뿌리를 알게 해주었으며, 잔설 속의 산동박으로 환희를 만들어 가슴에 부어주고, 진달래로 선녀의 옷자락을 만들어 눈 안 가득 하늘거리는 치졸한 시상을 떠올리도록 해 주는가?
이렇게 참으로 고맙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뜬눈으로 보게 해 주었던 많은 고마움이 내 살면서 갚아야 할 부채요 빚이 아닐까 하고 부담스러워해 본 적이 있다.
이에 ≪유학경림≫에 보이는 아름다운 동심의 소박한 지식들처럼, 무한하고 고차원적인 엄청난 학술 못지 않게 지식도 행복도 꿈도 사랑도 아주 작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세계와 같은 것임을 터득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책으로 읽는 이들에게 그 작은 기쁨을 주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아주 작은 바람으로 책을 다시 꾸며 내놓는다.
작은 지식의 확인도 때로는 ‘감동’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일찍이 내가 역주하여 이미 문제(問世)하였다. 그런데 늘 아끼면서 다시 들여다볼 때마다 누소하고 오자, 탈자, 오류 등이 발견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으며, 나아가 더 많은 자료를 덧보태어, 그야말로 어린아이들의 백과사전(百科事典)으로 풍부하게 정리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욕심을 저버릴 수 없었다. 더구나 여러 사정으로 그간 나의 총서를 출판하던 일도 중단되어, 교정을 보아도 재출간의 기회조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그동안 이루어 놓았던 원고는 물론, 이제껏 기출간(旣出刊) 여부에 관계 없이 모든 나의 저술을 재편집하여 <수정판>으로, 일관된 총서를 내어 전자책과 종이책으로 만들어보겠다고 하여, 속으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여겼다. 이제 나이로 보아도 영원한 시간은 얻을 수 없는 터에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슨 조화(造化)의 뜻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孔子)가 염원했던 “加我數年”의 천운(天運)을 만난 것이 아닌가 하였다.
그리하여 밤낮없이 매달려 다시 정리하고, 십삼경(十三經), 이십오사(二十五史), 제자백가(諸子百家), 전당시(全唐詩)며, 심지어 사고전서(四庫全書)며, 유서류(類書類)까지 잔뜩 차에 싣고, 고향 유와려(酉蝸廬)에 오면서도 거기에 노트북부터 챙겨가서 수정하였으나, 그래도 미진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독자 제현과 학자분들께서 아낌없는 질책을 성원도 함께 보내주기를 기다린다.
2024 甲辰年 용띠 해 음력 中伏에 茁浦 林東錫 酉蝸廬에서 다시 고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