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와 ≪맹자≫를 읽고 나면 흔히 ≪노자≫와 ≪장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중국의 양대(兩大) 사상의 맥락은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이다. 그런데 유가의 글이나 내용은 그동안 우리 문화의 너무나 많은 부분에 알려지고 퍼졌으며, 더구나 조선 시대에 거의 국학(國學)에 가까웠으므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분위기에 젖어 있다. 그리하여 생활 속에서 이를 인용하고 실천하며, 그것이 지극한 덕목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 심오하다는 도가의 글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제대로 안내를 받을 기회가 없었고, 더구나 ≪노자≫에 편중된 독서 분위기로 인하여 도가의 또 다른 저술이며 사상 표현의 극치인 이 ≪열자≫에 대하여는 별 주목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도가 사상은 흔히 노자(李耳), 장자(莊周), 열자(列御寇)로 대변된다. 그러나 실제로 열자는 장자보다 앞선 사람이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이 열자를 따로 다루지 않고 있어, 그의 사상과 생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오직 ≪장자≫의 ‘열어구(列御寇)’ 편을 통하여 그 면모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어보면, 도가의 사상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금방 맛을 느낄 정도로 접근하기 쉬운 글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쉽다는 것은 표현의 잘못일 수도 있다. 그저 그 어렵고 현묘한 도가 사상을 몇 가지를 통하여 감을 잡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뜻일 뿐, 내용이 평이하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도가의 글은 우선 이 ≪열자≫를 읽고 이어서 ≪장자≫, ≪노자≫로 순서를 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나는 ≪열자≫를 읽으며 내가 살아 있음에 대한 고마움을 만끽한다. 그것도 잠깐의 느낌이지만, 그 행복감은 아마 길게 이어질 것만 같다. 이러한 책을 만나 이렇게 읽고 느끼고 행복해 한다는 것이 곧 삶의 기쁨이다.
≪열자≫의 글 속에는 삶 자체의 행복과, 변화와 소멸의 자연스러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것 같은 평온함이 있다. 생존의 격렬한 투쟁이나 변화의 무서운 엄습이 없다. 그저 있음에 대한 발견과 고개 끄덕임이 아름답다. 경지에 오른 사물에 대한 조용한 인정이 어디서나 눈에 띈다. 이렇게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높은 경지의 ‘노닒’에 삶의 뜻을 두어도 그것이 부담감이나 의무에 대한 고통으로 다가오지 않도록 안도감을 준다.
학술적으로 도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조차 별 의미를 주지 않으며, 그저 ‘불구심해(不求甚解)’(깊이 이해하려는 부담감을 갖지 않음)의 독서법이어도 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우주와 천체의 이치를 거론해 보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의 무궁함에 대한 두려움을 피력해 보기도 하였으며, 명분과 실질의 차이를 알기 쉽게 풀이해 주기도 한다.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러나 그럴 수 있다고 이해가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인정이 되도록 하는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편하게 읽어도 되도록 유도하는 그 힘과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이다. 그것을 놓지 못해 지금 다시 눈에 닿는 한 장을 뒤적인다.
필자는 일찍이 ≪열자≫ 평역본(한글본)을 낸 적이 있다. 이는 본격적인 ≪열자≫ 역주서가 아니었으며, 쉽고 흥미 있는 내용을 축약하여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도록 한다는 목적으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작업을 하면서도 도리어 ≪열자≫처럼 심오한 고전을 그저 겉핥기식의 안내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우려를 떨치지 못하였다. 즉 학문적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괴로움이 늘 가슴을 맴돌았다. 그리하여 기회가 되면 이를 역주 형태로 다시 다듬고 정리하여, 일반인은 물론, 이제껏 필자가 일관되게 작업해 오던 완역상주(完譯詳註)로 출간하여 학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 그간의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어볼까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도 이미 이 ≪열자≫에 대한 번역서나 역주서가 많이 나와 있으며, 이들로부터 받은 도움과 노고에 대한 것도 상쇄되지 않을까 안위를 삼을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 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이 ≪열자≫도 한번 정리하여 체제에 맞추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주었다. 우선 천학비재(淺學菲才)의 내 능력이 부끄러웠지만, 다시 보충하고 수정하여 이번에 이 책을 내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독자 제현께서는 ‘여기에는 은이 없다’(此地無銀)는 단정보다는 ‘혹 금을 주울지도 모른다’(或有拾金)는 심정으로 읽어주시되, 오류와 누소(漏疏)함에 대하여는 언제라도 편달을 내려줄 것을 기망(企望)한다.
이 책은 또다시 삼호재(三乎齋) 박노일(朴魯一) 대표가 나의 여러 재출간하여 <수정판>으로 총서에 넣겠노라 하여 교정을 보고 형식을 꾸며 내게 되었음을 행복하게 여긴다.
갑진년 2024년 새해 벽두에 줄포(茁浦) 임동석(林東錫)이 취벽헌(醉碧軒)에서 고쳐